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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잎클로버- 행운

레벨 업은 싫지 않으니까

by. 소우주(@mikcosmos)

 

쿠로오 테츠로

 

긴 장마가 끝났지만 여름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귓가를 울리는 매미 울음소리만큼이나 쨍한 햇빛에 켄마가 눈살을 찌푸렸다. 나란히 걷던 쿠로오는 몸을 틀어 햇빛과 켄사 사이에 벽을 치듯 다가섰다.

 

켄마는 여름이나 겨울처럼 극단적인 계절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쿠로오는 제법 좋아하는 편이었다. 여름엔 덥다고 그늘 삼아 곁에 붙고 겨울엔 춥다고 바람막이 삼아 붙어오는 켄마가 있었으므로. 켄마는 오늘도 잠자코 곁에 있다. 나를 그늘 삼아. 쿠로오는 이런 순간마다 괜히 가슴 한켠이 팽팽하게 부푸는 것을 느꼈다.

 

그러니까 해 같은 거, 영영 져버리지 않아도 좋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쿠로오는 그 찰나의 감각에 매달리고 싶었다.

 

마침 오늘은 어제보다 해가 길었다. 갈수록 밤이 짧아지고 있었다. 아주 천천히 붉게 물드는 하늘을 바라보며 쿠로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여름 방학까지 일주일 정도 남았나. 올해는 켄마와 같은 교복을 입고 보낼 수 있는 마지막 여름이었다. 쿠로오가 시선을 힐긋 옆으로 돌렸다.

 

그러니까 코즈메 켄마, 네가 내 하복 모습을 볼 수 있는 날은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고.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할 말을 속으로 삼킨 쿠로오는 깍지 낀 손을 뒤통수에 대고 걸었다. 어쩐지 심통이 나서 보폭이 빨라지다가도, 밝은 톤의 머리칼이 노을을 한껏 집어삼킨 모습이 너무도 눈부셔서. 넋을 놓고 바라보느라 걸음은 다시 제 속도를 찾아갔다.

 

그와 반대로 심장은 더 빨리 뛰어댔지만.

 

아까부터 신작 게임에 집중해 있는 켄마의 손에서 가끔 뿅뿅 같은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

 

 

종종, 아니 꽤 자주 쿠로오는 켄마와 함께 있는 자신이 NPC 같다고 느꼈다. 플레이어인 켄마에게 퀘스트를 주거나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NPC는 ‘플레이’를 할 수 없는 역할이니까. 선택의 길을 안내해줄 수는 있어도, 모든 선택과 그에 따른 결과는 플레이어 즉 켄마의 몫이었다.

 

배구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쿠로오가 켄마에게 내준 퀘스트는 ‘배구를 같이 해줄 것’이었고, 켄마는 퀘스트를 수락했으며 아마도 이것은 내년을 마지막으로 끝날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꽤 길었다. 켄마가 이렇게까지 오랜 시간 동안 함께 배구를 해주리라곤, 처음엔 정말 생각지도 못했는데.

 

가끔 쿠로오는 자신이 졸업하고 없을 켄마의 3학년 생활이 궁금해서 참을 수 없는 상태가 되곤 했다. 켄마는 3학년이 돼서도 배구를 계속 할까? 아니면 퀘스트가 끝난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그만 둘까?

 

직접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번번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느 쪽의 대답이든 듣는 게 두려웠다.

 

켄마는 소위 ‘재탕’을 하지 않았으니까. 한 번 깬 퀘스트는 다시 도전하지 않았다. 가령 별 세 개 만점의 스테이지를 별 한 개로 클리어하게 되더라도, 그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다음 단계로 나아갈 뿐이었다.

 

그래서 쿠로오는 조금 비겁한 질문을 던지기로 했다.

 

“켄마, 나는 졸업하고 나서도 배구 계속 할 거야. 어떤 형태로든.”

 

조작 버튼을 누르던 켄마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그 잠깐의 망설임만으로도 게임은 끝났다. GAME OVER. 화면을 가득 채운 글자를 바라보던 켄마는 게임기를 끄고 쿠로오를 올려다봤다.

 

“알아.”

 

흔들림 없이 곧은 눈. 쿠로오는 알고 있었다. 저 호박색 눈동자가 자신의 시공간을 어떻게 앗아가는지에 대해서. 그것은 방금 켄마가 하던 게임처럼 아주 순식간에 벌어지는 일이었다. 잠깐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속절없이 저 눈동자에 사로잡히고 만다. 바로 지금처럼.

 

그리고 웃기게도, 너의 그 눈은 내 눈과 아주 닮아 있어서.

 

쿠로오는 자신의 신체 중에서 눈을 가장 좋아했다.

 

 

 

 

코즈메 켄마

 

 

레벨 업은 싫지 않으니까.

 

코즈메 켄마는 언젠가 쿠로오 테츠로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배구에 한정된 이야기는 아니었는데 말 뜻을 알아들은 건지 어쩐 건지, 당시 쿠로오는 그저 너답다며 웃고 넘겼다.

 

하지만 켄마는 레벨 업을 하기 위해, 단지 그것을 목적으로 게임을 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저 잠깐씩 즐기는 시간들이 쌓여 자연스럽게 레벨이 올라갔을 뿐, 랭킹에 집착하는 편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야 물론 레벨이 높아지면 더 센 녀석들과 싸울 수 있으니 재미있기야 하겠지만, 게임은 그게 전부가 아니니까. 어느 순간부터 착실히 퀘스트를 수행해나가는 즐거움이 켄마에게는 더 크게 작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즐거움을 알려준 것이 바로 쿠로오 테츠로였다.

 

어릴 적, 켄마는 쿠로오의 성화에 못 이겨 배구 연습을 같이 하면서도 자꾸 실패할 공격을 시도하는 쿠로오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나라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으로 공격할 텐데. 쿠로오는 항상 네트 그 너머를 바라보고 움직였다. 그러니까 현재의 눈높이보다, 언젠가 더 높은 네트를 마주할 자신을 상상하며. 지금 당장 성과는 없더라고 조금씩 착실히.

 

재능이 빛을 발하는 시기까지 도달하는 게 어려울 뿐, 한 번 물꼬가 트인 쿠로오는 새 스킬도 잔뜩 얻고 경험치를 쌓아 레벨을 올렸다. 어쩌다 보니 쿠로와 함께 연습한 켄마의 레벨도 같이 올라갔다. 파티 퀘스트 같은 거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든 날은 마냥 즐겁기도 했다.

 

켄마는 기본적으로 게임에 있어 종류를 가리지 않았지만 배구를 계속 할수록 가챠 같은 게임을 즐기지 않게 됐다. 좋은 아이템을 소유하는 일은 물론 기분이 좋았지만 모든 게 그저 운으로 이어지는 방식이 시시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켄마가 가챠를 돌릴 땐 기간 한정 이벤트가 열리거나 가챠를 통해서만 가질 수 있는 아이템이 필요할 때 뿐이었다.

 

“그럼 켄마, 너는 살다가 우연히 얻은 아이템 같은 거 없어?”

 

그때 쿠로오는 이렇게 물어왔다. 모처럼 늦잠을 자고 일어난 주말의 일이었다. 다짜고짜 문을 열고 들이닥치는 쿠로오에 이쯤 되면 적응할 법도 하건만, 켄마는 번번이 깜짝 놀라곤 했다. 습관처럼 켄마의 시선이 쿠로오의 팔 쪽으로 향했다. 배구 공은 들고 있지 않았다.

 

대신 쿠로오는 게임을 하자고 했다. 한 번 쉬어 보자고. 대회도 다 끝났으니까 느긋하게. 켄마는 잠시 망설였다. 쿠로오와 함께 게임을 하는 게 몇 년 만이더라. 아주 어릴 때를 제외하고 쿠로오에게 게임은 오로지 배구였기 때문에 켄마가 즐겨하는 게임을 같이 하지 않은 지 오래였다.

 

켄마는 적당한 게임을 고르고 쿠로오에게 건넸다.

 

“가챠는 무시해도 돼.”

 

친절한 설명을 덧붙이면서. 쿠로오는 켄마를 보며 게임할 때만 친절하게 군다고 놀려댔다. 그리곤 대화를 이어나갈 새도 없이 서로 게임에 열중했다. 화면에 가챠 이벤트가 뜨자, 쿠로오는 문득 켄마에게 질문을 던졌다.

 

우연히 얻은 아이템. 켄마는 쿠로오를 빤히 바라봤다. 자신과 비슷한 눈동자가 답을 기다리며 반짝이고 있었다.

 

넝쿨째 굴러온 호박이라면 있었다. 근처에 또래가 이사 왔다는 이유만으로 함께하게 된 누군가가. 켄마는 종종 생각했다. 만약 그때 쿠로오가 옆집으로 이사 오지 않았더라면? 쿠로오와 자신이 또래가 아니어서 어울릴 수 없었더라면?

 

하지만 그런 생각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쿠로오 테츠로는 코즈메 켄마 옆집에 이사를 왔고, 또래였다. 운이 좋았지. 문득 웃음이 났다. 켄마는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대답했다.

 

“가챠는 노리지 않고 예상치 못했을 때 얻는 게 더 기쁜 법이니까. 그때를 위해서 아껴둬도 좋아.”

#후기

#세카이노_쿠로켄

 © 2020.08.19 Kuroken Flower Collaboration with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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