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느티나무- 운명
by. 낰낰(@jj_hq_10)

달이 뜬 밤하늘 아래로 느티나무 한 그루가 보였다. 굵은 몸통의 줄기를 타고 올라가면, 빽빽이 늘어진 가지가 바람결에 흔들리며 그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분명 처음 보는 나무였음에도 그 모양이 이상하게도 익숙해 눈을 끔뻑였다. 전국시대에나 있을 법한 기와집이 나무 옆으로 늘어서 있었고, 허리까지 자라난 풀들이 공간을 무성하게 메우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테츠로의 의문은 입을 통해 나오지 못하고 머릿속에서만 맴돌았다. 딱 붙은 입은 제 의지로 움직이지 않았고, 누군가 강제하듯 제멋대로 움직이는 몸은 걸음을 옮겨 우뚝 선 느티나무로 천천히 향했다. 가까이 다가서자 우거진 수풀 사이에 파묻힌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테츠로는 의지와 상관없이 급히 다리를 움직여 나무 아래로 다가갔다. 다리를 휘감는 치렁치렁한 옷자락이 걸음을 방해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나아갔다. 옷이 왜 이렇지? 옛 시대에나 입을만한 의복을 걸치고 있는 것에 대한 의문은 금세 사라졌다. 나무 둥치에 기대 쓰러진 한 소년의 모습을 본 순간, 테츠로는 뿌리박힌 듯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암흑이 찾아왔다.
“어이 테츠로, 밤새 뭘 했길래 그리 피곤해하냐?”
모리스케의 장난기 섞인 물음이 배구공과 함께 테츠로에게로 날아왔다. 멍한 눈으로 배구공을 응시하던 그는 머리를 쓸어넘기며 피곤한 눈가를 문질렀다. 이른 아침부터 부 활동을 하는 지금까지, 무기력한 몸을 억지로 움직이느라 무척이나 피로했다. 당장이라도 늘어져 눕고 싶었다.
“그냥, 잠을 좀 설쳐서.”
“왜, 악몽이라도 꿨어?”
“그건 아니고. 뭔가 좀 묘한 꿈을 꾸긴 했지.”
“몽정 아니고?”
그런 거 아니야 인마. 질색한 테츠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저를 놀리는 모리스케에게 배구공을 내리꽂았다. 닥치라는 의미였다. 물론 뛰어난 리베로답게 깔끔하게 리시브해내 별 소용은 없었지만 테츠로는 대화의 맥락을 끊어낸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오늘 라멘 고?”
“어디로 갈 건데?”
“그, '운메이'였나? 이번에 새로 생긴데.”
굳이 피곤한 몸을 이끌고 갈 만큼의 구미가 당기는 건 아니었는데도, 왠지 모르게 마음이 동했다. 가봐야만 할 것 같았다. 설명하기 어려운, 굉장히 이상한 기분이었다. 테츠로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라멘 먹는 게 뭐 대수겠어.
“어이 야쿠, 이렇게 멀다는 말은 없었잖아?”
“닥치고 그냥 따라오지? 가겠다고 한 건 너였다.”
멀어도 적당히 멀어야지, 이건 뭐 학교에서부터 벌써 몇 블록을 걸어온 건지 감도 안 잡혔다. 햇볕이 내리쬐는 낮이었다면 진즉에 포기하고 돌아섰을 수준의 거리였다. 테츠로는 괜한 기분에 휩싸여 귀찮은 짓을 저지른 과거의 자신을 쥐어박고 싶어졌다. 뭐한 거냐 나. 피곤한 눈빛으로 건널목 앞에 멈춰선 테츠로는 한숨을 쉬며 목을 이리저리 돌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가벼운 스트레칭으로 지친 몸을 조금이나마 풀어내던 그가, 우연히 왼편의 도로 건너를 바라본 순간.
“어?”
커다란 느티나무가 보였다. 꿈에서 보았던 그것과 몹시 흡사한 모양새라 테츠로는 팔을 쭉 뻗던 자세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파란불이 들어온 횡단보도를 건널 생각도 못 하고, 놀란 눈으로 옆만 바라보고 있자 모리스케가 그를 잡아끌었다.
“야 뭐해. 안 건너?”
“아니, 잠, 잠깐만.”
테츠로는 모리스케의 손이 닿은 순간 얼음 땡 하듯 굳어있던 것을 풀고 아예 몸을 돌려 도로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꿈속에서와 똑같은 나무는 꿈에서처럼 풍성한 가지를 하늘 높이 뻗은 채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로, 한 소년이 느티나무를 지나쳤다.
“어, 어!”
“야! 왜 그러냐니까!”
꿈에서 본 소년이 시야에 들어온 순간, 현실감이 사라지며 주변의 모든 것이 지워지듯 옅어졌다. 모리스케의 목소리가 멀어지며 귀가 닫혔다. 눈앞의 커다란 느티나무와 노란 머리칼의 소년. 오직 그 둘만이 테츠로의 시선 안에 가득 들어찼다. 어, 어, 어어. 만들어지지 못한 말이 형체 없이 그의 입을 타고 흘러나왔다.
“야!! 쿠로오 테츠로!!”
“...아-”
그리고 소년의 모습이 사람들 속에 섞여 사라진 순간, 주변의 풍경이 다시 그려지며 테츠로를 현실로 되돌려놨다. 소름이 돋을 만큼 이상한 경험이었다.
*
또다시 느티나무다. 어둡게 물든 한밤중, 홀로 높이 솟은 느티나무 아래에는 여전히 작은 소년이 누워있었다. 테츠로는 그 앞에 서서 소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겉은 노란데 속이 까만 특이한 머리칼. 자그만 얼굴과 여기저기 찢어진 남루한 의복. 미동 없이 굳어있는 몸. 이번에도 제멋대로 몸이 움직였다. 한쪽 무릎을 꿇고 소년 앞에 앉은 그가 소년의 코 아래에 손을 가져가 대었다. 숨을 확인해보니 그 작은 몸은 마치 발악이라도 하듯 가늘고 힘겹게 호흡을 뱉어내고 있었다.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하는 의지가 꼭 빗길 아래 덜덜 떨며 몸을 숨긴 새끼고양이 같았다. 거두지 않으면 기어코 스러지고 말, 작고 약한 것. 테츠로는 저도 모르게 그리 생각하며 소년의 몸을 일으켜 안았다.
“영주님, 그자를 어찌하시려고...”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사람들이 뒤에서 나타나 그의 주변을 둘러쌌다. 하나같이 시대극에서나 볼법한 옷을 입은 자들이 그를 보며 연신 허리를 숙였다. 테츠로는 자연스레 입을 열었다. 아니, 입이 열렸다.
“이리 두면 곧 죽겠지. 내가 데려가겠다.”
“허나, 행색을 보아하니 서북의 ‘지코쿠’ 출신 닌자가 분명합니다.”
“그렇다 한들 죽어가는 생명을 외면할 순 없지 않겠느냐.”
테츠로는 죽어가는 사람을 그냥 두고 갈 만큼 냉정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걸레짝이 된 옷에서 ‘지고쿠’의 문양이 잘려나간 것을 보니 유파에서 버려진 게 분명했다. 어차피 버려진 것, 제가 거둔다 해서 문제 되진 않겠지. 테츠로는 제 머릿속에 멋대로 떠오른 생각들이 낯설었다. 이런 걸 내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의문은 길지 않았다. 이어 생각할 틈도 없이 그는 소년을 고쳐 안고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바로 옆, 쭉 뻗은 담벼락이 으리으리하게 늘어선 기와집. 그곳이 젊은 영주, 테츠로의 ‘장원’이었다.
테츠로는 어느 순간부터 서서히, 제가 꿈을 꾸고 있음을 잊기 시작했다.
소년은 쉽사리 깨어나질 못했다. 어깨의 상처를 통해 스며든 독은 한참이나 그를 괴롭혔다. 테츠로는 집무를 보다가도 종종 소년의 방에 찾아가 그를 보곤 했다. 하얀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닦아주고, 조그만 입술을 벌려 과일즙을 흘려 넣고, 상처의 경과를 확인하며 천을 갈아주고. 그러고도 소년이 깨어나지 않으면 옆에 앉아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고운 이목구비가 통증으로 찡그려져 주름을 자아내는 것이 안타까웠다. 어서 깨어나면 좋으련만. 그는 소년의 눈을 뜬 모습이 궁금해졌다. 일어나면 어떤 눈으로 저를 바라볼까, 무슨 말을 입에 담을까. 알 길 없는 호기심은 끝없이 쌓여만 갔다. 그리고 소년을 데려온 지 정확히 일주일째 되는 날, 드디어 그가 눈을 떴다.
“영주님, 그 소년이 깨어났다고 합니다.”
“내가 직접 가겠다. 미음을 준비하고 환약을 가져와.”
집무실에서 영지의 일을 보던 테츠로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몸을 일으켰다. 급한 발걸음으로 긴 복도를 지나 요 며칠 제 방처럼 드나들었던 끝방 앞에 선 테츠로는 지체 없이 미닫이문을 열어젖혔다. 나무가 마찰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경계하듯 치켜 올라간 옅은 호박색 눈동자가 그를 마주했다.
“깨어났구나.”
“...여기가 어디야.”
소년은 아직 회복되지 않아 말을 듣지 않는 몸을 최대한 낮추며 그를 경계했다. 그 모양새가 꼭 새끼고양이의 하악질을 보는 듯해 테츠로는 조금 웃고 말았다. 정신을 차린 소년은 제 생각보다 까칠하고, 의심이 많았으며, 새초롬하니 어여뻤다.
“뭐야, 왜 웃어?”
“꼬리를 잔뜩 부풀린 괭이를 보는 듯하구나.”
“뭐? 너 지금 뭐랬어.”
뒤에 서 있던 수하들이 발끈해 나서려는 것을 저지한 테츠로가 문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 모습을 주시하던 소년은 테츠로가 한 발자국씩 가까워질 때마다 아픈 어깨를 감싸며 몸을 뒤로 물렸다. 결국, 벽에 닿아 갈 곳 없이 옴짝달싹 못 하게 되자 여유로운 걸음으로 제 앞에 다가온 테츠로를 노려봤다.
“오지 마.”
“내 집에서 내가 가지 못할 곳은 없단다.”
소년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돌렸다. 죽어가던 제가 왜 이런 으리으리한 곳에 누워있던 것인지, 앞에 서 있는 커다란 남자는 누구인지, 그 어떤 것도 짐작 가는 것이 없었다. 정황상 저를 주워와 살려둔 것이 이 남자라는 것 외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어, 그는 행동의 방향을 정할 수가 없었다. ‘지고쿠’에서도 이런 상황에서의 행동 수칙 따윈 알려 준 적이 없었다. 태어난 순간부터 언제나 지시대로만 움직여왔던 그는, 처음으로 맞닥뜨린 상황에 그저 약한 짐승처럼 아픈 몸을 끌어안고 한껏 움츠릴 뿐이었다. 테츠로는 그런 소년의 앞에 시선을 맞추며 앉았다.
“이름이 무엇이냐.”
“천한 놈의 이름, 알아서 무엇하게.”
“앞으로 함께 살아갈 자의 이름도 몰라서 되겠느냐.”
소년의 호박색 눈이 크게 뜨였다. 동그랗게 치켜 올라간 눈은 그야말로 고양이를 연상시켜 테츠로는 저도 모르게 소년의 머리 위로 손을 올리고 말았다. 손바닥에 맞닿아오는 머리칼이 보들보들했다. 처음 당해보는 상황의 연속, 소년은 마치 혼이 빠져나가기라도 한 듯 몸을 굳히고 움직이질 못했다. 어안이 벙벙했다. 앞으로 제가 이곳에서 살아갈 것이라는 말도, 제 머리를 쓰다듬는 사내의 부드러운 손길도, 전부 낯설고 또 낯설어서. 그는 어찌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름은?”
“....켄마.”
“성은 없느냐.”
“나 같은 것에게 성이 있을 리가.”
정신없이 떨리는 눈을 한 주제에 조그만 입술로 뱉어내는 말은 여전히 까칠했고, 건방졌다. 그 또한 마음에 들어서 테츠로는 옅게 웃으며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성은 코즈메가 좋겠구나. 외톨이 발톱, 소년의 모습과 꼭 어울리는 그것을 성으로 주었다. 켄마는 저를 향해 잔잔히 미소 짓는 다정한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코즈메 켄마. 제게 완성된 이름이 생겼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얼떨떨하고 이상했다. 왜 제게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인지, 그는 조금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
배구공이 커다란 손바닥에 맞고 퉁, 튀어 올랐다. 기계적으로 손을 움직이며 배구공을 튕기는 테츠로의 머릿속은 이상한 꿈에 관한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 꿈은 정말 이상했다. 각각 다른 날에 꿨음에도 내용이 이어졌고, 꿈임을 자각하고 있음에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꿈의 내용이 이어질수록 자각이 사라져, 어느새 저는 꿈속의 영주 그 자체가 되어있었다. 이런 이상한 일을 겪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 인터넷에 검색도 해보았지만 그다지 도움이 되는 이야기는 없었다. 저 같은 사람이 또 있을까? 문득 지난번 라멘 먹으러 가던 길에 마주친, 느티나무 아래를 지나가던 한 소년이 떠올랐다. 꿈에서 보았던 그 아이. 테츠로는 손에 착 감겨 들어온 배구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다시, 그 느티나무를 찾아가 봐야겠다.
여름의 낮은 길었고 부 활동이 끝났음에도 아직 해 질 녘 즈음이었다. 테츠로는 붉게 물든 하늘 아래로 쭉 뻗은 길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한 블록, 두 블록을 넘어 점차 가까워질수록, 알 수 없는 긴장감이 그의 발끝을 타고 올라왔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어린아이도 아니고 고작 꿈 하나에 얽매여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걸까. 이성은 그리 말하고 있었지만, 그의 직감은 자꾸만 그를 비현실로 이끌었다. 평소 판타지를 좋아하지도 공상과학을 믿지도 않았으나, 그는 본능적으로 이것이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예감했다. 무언가 있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그것을 알아야만 할 것 같았다.
어느새 길 너머로 여전히 우뚝 서 있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보이기 시작했다. 테츠로는 발걸음의 속도를 올렸다. 도심 속에 빽빽이 들어찬 건물들을 지나치고, 도로를 건너고, 마지막 건널목에 도착한 그때. 거짓말같이 그 아래에 서 있는 소년이 눈에 들어왔다. 여전히 애매한 노란 머리를 하고, 등을 돌린 체 우두커니 서서 느티나무를 올려다보는 소년. 그러니까,
“코즈메... 켄마...”
멍청히 내뱉은 말이 스스로의 귓가에 닿음과 동시에 그는 의식하지도 못한 채로 발을 떼었다. 그를 도와주듯 바뀐 파란불을 지나쳐 테츠로는 정신없이 달렸다. 숨이 차는 것도 모르고 단숨에 느티나무 아래에 도착한 그가 소년의 손목을 잡아채 돌렸다. 그 모든 찰나가 느리게, 또 느리게 펼쳐졌다. 작은 얼굴이 돌려지며 서서히 드러났고, 꿈과 같은 호박색 눈동자가 그를 향해 나타났다. 테츠로는 놀란 듯 크게 뜨인 눈을 가만히 마주 보았다. 둘 사이에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커다란 소년과 작은 소년은 그저 가만히 서로를 바라보며 멈추어 있었다. 그러다 고양이 같은 동공이 오롯이 시야에 들어찬 순간, 테츠로는 정신을 차렸다.
“아, 죄, 죄송합니다... 제가 아는 사람을... 닮아서.”
소년의 눈에 들어찬 의아함이 모든 걸 설명해주었다. 아, 이 애는 나를 모르는구나. 그는 자신을 알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억지로 입을 열어 띄엄띄엄 사과의 말을 건넨 테츠로는 잘게 떨리는 눈으로 소년을 내려다보다, 이내 힘없이 등을 돌려 비척비척 멀어졌다. 삽시간에 현실로 끌어내려진 기분이었다. 전부 멍청한 짓이었나. 테츠로는 머리를 쓸어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원인 모를 답답함이 가슴을 가득 메웠다.
그런 테츠로의 등을 멍하니 바라보던 소년, 켄마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며 어느새 멀어진 남자의 등을 한번, 고개를 돌려 느티나무를 한번, 여전히 압박감이 느껴지는 제 손목을 한번 내려다보았다. 언제나 비상하던 그의 두뇌가 이제야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득한 비현실감에 잠시 멈추었던 그의 이성이, 그제서야 지금이 꿈속이 아님을 알렸다. 영주? 불신을 가득 담아 작게 읊어진 단어가, 현재 켄마의 상태를 증명해주었다. 자꾸만 꾸는 이상한 꿈을 줄곧 무시해오다, 과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의 실체를 확인해보기 위해 이곳을 찾아온 것일 뿐인데. 더더욱 비과학적인 것을 마주하고 말았다. 영주가, 정말로 있었다. 대체... 아연해지는 기분에 켄마는 다시 고개를 들어 길 너머를 보았다. 그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
나무로 만들어진 복도의 마룻바닥은 종종 걸레질을 해도 닦이지 않을 때가 있었다. 켄마는 그럴 때면 짜증스럽게 헝겊을 내던지곤 했다. 오늘도 그랬다. 하필 무사들이 자주 다니는 구역을 맡아 얼룩이 끔찍이도 많았다. 당장에 수리검으로 긁어내고 싶은 마음을 담아 손에 들린 천 더미를 바닥으로 내팽개치자, 마침 지나가던 하녀들이 그를 보며 귀엽다는 듯 웃었다. 켄마는 민망함에 고개를 돌리고 다시 헝겊을 주워다 바닥에 쪼그리고 앉았다.
“무엇이 또 그리 심통 났어?”
오늘도 어김없이 영주, 테츠로가 그를 찾아왔다. 켄마는 다정한 낯으로 저를 바라보며 웃는 그를 보고 팩- 고개를 돌렸다. 대답 없이 성질부리는 것이 그다워서 테츠로는 작게 웃음을 흘리며 켄마의 앞에 마주 앉아 벽에 등을 기대었다. 그러자 세로로 뾰족한 눈이 뾰족한 감정을 담고 찾아왔다. 그게 또 반가워 테츠로는 그저 미소지었다.
“거기 앉으시면 청소를 할 수가 없는데.”
존대로 하대도 아닌 애매한 말투로 불만이 쏟아졌다. 켄마는 어느새 자신이 이 집에 머무르게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고, 사용인의 신분이 되어 영주에게 깍듯이 굴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틈만 나면 저를 찾아와 어린 괭이 새끼 보듯 건드는 그에게 도저히 간지러운 경어가 나가질 않았다. 경을 칠 일이었으나 고매하신 영주께선 그저 웃고 넘어갈 뿐인지라 그건 또 그것대로 간지러워 켄마는 아예 입을 다물곤 했다. 그럴 때면 귀신같이 알아차리곤 어떻게든 제 입을 여는 것이 이 능글맞은 남자의 능력이었다.
“청소를 하지 않으면 되겠구나.”
“.....일인데 어떻게 안 해?”
기어코 반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눈을 흘기며 말하는 꼴이 퍽 귀여워, 테츠로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켄마의 손에서 지저분해진 헝겊을 빼앗아 들었다. 그리고 남은 한 손으로 어느새 익숙해진 노란빛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가락 사이로 보들 거리는 머리칼이 스치고, 동글동글한 선을 따라 목덜미까지 부드러이 내려가는 느낌이 좋았다. 켄마는 늘 그래왔듯 쿠로오의 손바닥 안에서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이럴 때마다 어찌해야 할지 몰라 곤란해하는 게 눈에 훤했다. 그 모습이 마치 경계를 풀고 손을 대도 도망가지 않는, 드디어 길들여진 고양이를 보는 듯해 테츠로는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하얗고 가는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무표정한 얼굴이 결국 허물어지고, 귓가가 붉어질 때까지. 그렇게 애정 어린 손길로 그를 토닥이고 어루만졌다. 그 손길과 온기에 켄마는 간질거리는 심장께를 긁지도 못하고 평소처럼 테츠로의 발끝만 바라보았다. 이 익숙하면서도 낯선 것은, 평생 적응하지 못할 것 같았다.
잠자리에 드는 시각은 언제나 자정을 넘어선 새벽 즈음. 닌자 생활에 맞추어 자라난 몸은 이른 시간에 잠이 들지 못했다. 켄마는 언제나 뜬눈으로 창틀 너머에 걸린 달빛을 바라보며 시간을 지새우곤 했다. 그러면 어김없이 산책인 양 그 앞을 지나치는 남자가 나타났다. 열린 창 너머로 안을 들여다보곤 눈이 마주치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는 남자. 어찌 저리 웃음이 헤플까. 곱게 자란 사람들은 모두 저리 허파에 바람이 들어찬 걸까. 무심한 눈길로 그를 보던 켄마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쁘신 주제에 잊지도 않고 매번 찾아오는 저 인간이나, 매번 휘둘리고야 마는 저나,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오늘도 잠이 오질 않는 것이냐?”
“밤은 활동할 시간이니까.”
“허면 오늘도 나와 어울려 주겠느냐-”
창틀에 두 팔을 올려 턱을 괴고는 여유롭게 물어오는 낮은 음성이, 자꾸만 발치를 간지럽혀 가만히 있게 두질 않았다. 켄마는 결국 겉옷을 주워 입고 창으로 다가갔다. 빙글빙글 웃는 낯에 가까워질수록 발끝에서 시작된 간지럼이 온몸을 타고 올랐다. 켄마는 부러 시선을 피하며 창턱에 다리를 올려 힘주어 넘었고, 필요 없음에도 손을 건네온 이가 켄마의 어깨를 잡고 끌어안으며 그를 받아주었다. 상대 또한 제게 그런 도움 따위 필요 없음을 알았다. 그런데도 그는 끈질기게 자신을 받아 안았다. 온몸이 짜증 나게 간지러웠다.
“내가 닌자 출신인 걸 자꾸 잊는 것 같은데, 영주님.”
“그러게 말이다. 내 요즘 자꾸 건망증이 도는구나.”
심술을 부려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치는 게 얄미웠다. 켄마는 구겨진 옷자락을 털어내며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본디 감정이 잘 일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자꾸 이 남자만 보면 심술이 나고 부끄럼이 일었다. 제가 이런 감정들을 가질 수 있음에 놀라우면서도, 조금 두려웠다. 괜히 입술을 한 번 짓씹은 켄마는 눈을 내리깐 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일찍 자면 되잖아. 왜 자꾸 찾아와?”
목소리는 바보같이 떨리고 있었다. 제 생명의 은인, 제게 주어진 유일한 온기, 처음으로 저를 예정해주는 사람. 이 모든 게 어느새 말라붙은 그의 가슴에 물을 주었다. 평생 가지리라 생각도 못 했던 마음들을 키워냈다. 그래서, 그래서 그는 겁이 났다. 자꾸만 저를 변화시키는 게 무서웠고, 그렇기에 밀어내고 싶으면서도, 정말 밀려 나가 다시 제 속이 공허하게 비워질까 무서웠다. 짜증 나게도.
테츠로는 가느다란 속눈썹 아래로 달빛이 그려낸 그림자를 보며 옅게 웃었다. 다가갈 때마다 움츠리고 숨는 게 귀여웠다. 그러면서 손끝은 온기를 갈구하며 제게 슬쩍 내밀고 있는 것이. 정말 사랑스러웠고, 어여뻤다. 차오르는 정애를 느끼며 테츠로는 손을 뻗어 조그맣고 거친 손을 잡아 올렸다. 동그란 눈이 손을 따라 올라와 그를 보았다. 테츠로는 달빛에 반짝이며 빛나는 호박색 눈을 마주한 체, 상처 가득한 손바닥에 천천히 입을 맞추었다.
“자꾸만 생각이 나, 잠이 오질 않는구나. 그러니 잠이 오지 않는 자들끼리 밤을 지내면 되지 않겠느냐?”
“....짜증 나.”
“그래그래, 그럼 산책하러 가자꾸나.”
쥐어진 손을 놓지 않은 채 테츠로가 발걸음을 떼었다. 켄마는 어쩔 수 없이, 정말 별수 없이 그를 따라 발을 옮겼다. 손에 닿아온 온기가 가슴께까지 타고 올라와 옮겨붙었다. 언제 나와 같은 달빛이, 그들을 환히 비추는 밤이었다.
*
“켄마, 오늘도 먼저 갈 거야?”
“응, 내일 보자.”
“그래! 어제도 그 꿈 꾸고 별로 못 잤지? 피곤해 보이는데 푹 쉬어-”
켄마는 배구화를 달랑달랑 들고 밝게 물어오는 히나타 쇼요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하고 싶은 부 활동이 없어 결국 귀가 부를 택한 켄마는 언제나 쇼요보다 일찍 하교했다. 가끔 끝날 때까지 기다려 함께 저녁을 먹으며 놀기도 했지만 그것은 정말 아주 가끔, 쇼요의 생일 같은 날에나 있는 일이었다. 금세 가방을 싸고 몸을 일으킨 그는 쇼요에게 인사한 뒤 미련 없이 학교를 떠났다.
학교에서 집에 가는 길에, 항상 지나치는 느티나무가 있었다. 지름길로 다니면 볼 수 없었지만 조금 느긋하게 돌아가는 길에서는 마주칠 수 있었다. 켄마는 비효율적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주로 지름길로 다녔으나, 이상한 꿈을 꾸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괜히 그쪽으로 돌아가곤 했다. 오늘도 여느 때와 같이 느티나무 밑, 벤치에 앉아 게임기를 만지작대던 켄마는 거의 2시간쯤을 채우고 고개를 들었다. 벌써 해 질 녘, 이만 돌아가야겠다 싶어 가방을 메고 일어나 집으로 가려는 찰나, 횡단보도 건너에 신기루처럼 서 있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또 한 번 둘 사이를 감싸는 공기가 반짝이며 천천히 멀어졌다. 파란불이 켜졌지만 둘 중 누구도 움직이질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 사이를 지나쳐도, 마치 보이지 않는다는 듯 서로의 눈만을 들여다보았다. 다시 신호가 바뀌고 빨간불이 켜지는 순간, 켄마가 먼저 등을 돌려 그곳에서 멀어졌다.
꿈속의 저처럼 지금의 저도, 손등을 타고 올라오는 간질임을 좀처럼 이겨낼 재간이 없었다.
*
밤의 느티나무는 낮보다 신비로웠고, 비밀스러웠다. 켄마는 밤 산책을 나올 때마다 테츠로의 손에 이끌려 꼭 그곳을 지나쳐야 했다. 임무에 실패하고 버려진 뒤, 살겠다고 기고 또 기어, 마침내 나무 밑동에 기댄 체 풀숲에 몸을 숨기고 정신을 잃었던 곳. 그런 그를 테츠로가 주웠고 그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느티나무는 그에게 새로운 삶은 준 연이 깊은 장소였다. 켄마는 답지 않게 감성적인 생각을 하며 그 앞을 빗자루로 쓸었다.
어쨌든 지금은 낮이었고 그는 오늘 배정받은 장원의 바깥, 느티나무 근처를 청소해야 했다. 오늘은 장원 내가 아니라 영주도 찾아오지 않겠네. 그는 자꾸만 드는 아쉬움에 애꿎은 빗자루만 꾹꾹 눌러댔다. 어느새 장원에서 지낸 지 두 계절이 흘렀고, 화창한 여름이 찾아왔다. 그러는 동안 그는 영주와 애정, 비슷한 것을 나누었다. 사용인들도 전부 그를 영주의 정인으로 대해 일도 못 하게 하려는 걸 바득바득 우긴 뒤에야 계속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그는, 자신에게 찾아온 이 모든 낯선 일들이 믿기지 않았다. 왜 제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너무 무겁고 엄청나서 차마 좋은 일이라고 칭하지도 못한 켄마는 가슴이 몽글해질 때마다 주제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설렘이라는 감정이, 감히 저 같은 이에게도 찾아올 것이라곤 상상도 못 했다. 근데 자꾸만 왔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서 그를 괴롭혔다. 마치 그 남자처럼.
“오늘은 바깥이구나. 덥진 않으냐.”
“그늘이니까, 괜찮아.”
호랑이도 제 말하면 찾아온다던가. 입을 열어 소리 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알고 저를 찾아왔다. 켄마는 풀어지려는 얼굴을 애써 굳히며 덤덤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러나 남자는 속을 꿰뚫어 보는 눈을 하고 그에게 다가와 다정스레 머리를 넘겨주었다. 표정은 숨겼어도 달아오른 열까지 감추진 못해 피부 위로 고스란히 드러났다. 옅게 웃은 테츠로가 켄마를 끌어당겨 제 품에 넣었다.
“덥지 않다니 이러고 있어도 되겠구나.”
“....불편해.”
“조금만 참아주거라. 오늘은 너무 힘이 들어, 충전이 필요해.”
켄마는 넓은 품에 묻힌 체 고개를 들어 테츠로를 올려다보았다. 확실히 그는 지치고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서북의 노헤비가 자꾸 사사건건 훼방을 놓는다 했던가. 서북을 주름잡는 노헤비와의 대립으로 최근 들어 장원에 날카로운 기류가 바짝 서 있었다. 그렇기에 평소라면 습관처럼 밀어냈을 테지만 오늘만은 가만히 안겨있어 주기로 했다. 팔을 아주 조금 들어 슬며시 그의 허리에 감은 켄마가 그를 향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아?”
“이런, 나를 걱정해주는 것이냐?”
기쁘구나. 밀어내고 도망갈 줄만 알던 고양이 같은 연인이 어느새 저를 걱정해줄 줄도 알았다. 그의 마음이 이만큼 열렸다는 것이 기쁘고 또 감격스러워, 감출 길 없이 웃음을 터뜨린 테츠로는 그가 싫어하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힘주어 꼭 끌어안았다.
“괜찮지 않았는데, 이제 다- 괜찮아졌다.”
“숨 막혀, 영주.”
“미안하다, 그렇지만 조금만 더 있어 주겠느냐.”
이번에도 켄마는, 마음에 들지 않아 뚱한 기색을 하면서도 가만히 있어 주었다. 그게 못 견디게 사랑스러워 결국 테츠로는 노란 머리 위, 작게 삐져나온 검은 머리칼에 입을 맞추었다. 깜짝 놀라 품 안에서 바르작거리는 걸 꼭 잡고 동그란 이마와 앙증맞은 콧잔등, 살이 올라 봉긋해진 뺨에 이어 분홍빛 입술에까지 입맞춤을 퍼붓자, 켄마가 새빨개진 얼굴로 테츠로의 등을 퍽퍽 때려왔다. 감히 영주의 몸에 손을 댔다며 나무라기엔 이미 서로의 몸을 전부 가진 뒤였고, 손에 들어간 힘이 닌자라기엔 퍽 약해 테츠로는 그저 기쁘게 웃었다.
“미쳤어, 미쳤어.”
“매번 그리 부끄러워하니 익숙해지도록 도와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필요 없어.”
“내가 필요한데 이를 어쩌나. 안 되겠구나, 너에게 새로운 성을 주어야겠어.”
뭐? 켄마는 몸부림치던 것도 잊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코즈메라는 성을 받은 순간이 아직도 가슴에 박혀 생생한데, 그것을 빼앗으려고? 대번에 날카로워진 눈이 그를 노려보았다. 안돼, 내 거야. 네가 주었잖아, 다시 가져가지 마. 그리 말하는 것이 여실히 느껴져 테츠로는 능청스러운 얼굴을 하고 입꼬리를 당겨 미소지었다.
“그것 말고, 쿠로오가 좋겠구나.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켄마의 부릅뜬 눈매가 힘을 잃고 떨리기 시작했다. 숨조차 멈추어버리자 테츠로는 이런, 짧은 탄식을 내뱉고 켄마의 등을 가만가만 쓰다듬어주었다. 쉬, 숨은 쉬어야지? 옳지. 켄마는 아무런 말도 뱉지 못하고 그저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새하얘진 체 멍하니 그의 손길만을 느꼈다. 말도 안 돼. 정말, 말도 안 된다. 감히 나 같은 것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도 되나? 참으로 믿기지 않는 일이라 그의 옷자락만 붙들고 천천히 숨을 몰아쉬자, 그의 귓가에 여전히 따듯하고 달디단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답은 천천히, 원할 때 해도 괜찮다. 허나 내가 원하는 대답이었으면 좋겠구나.”
켄마는 눈을 질끈 감았다. 감당할 수 없는 행복이 기어코 찾아온 것에, 몹시도 두려워 몸을 떨었다. 걷잡을 수 없이 솟구치는 감정이, 이것을 박탈당했을 때의 고통부터 떠올리게 했다. 저를 감싸 안고 있는 단단한 품이 너무 좋아서. 그래서 괴로웠다.
*
그날따라 쉬이 잠이 오질 않았다. 낮의 일 때문인지, 앞으로의 미래가 두려워서인지. 자꾸만 상념에 잠겨 켄마는 꼬박 밤을 새우고 말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오늘은 밤 산책도 물리고 홀로 휘영청 떠오른 달을 바라보며 한참을 고요히 비워냈다. 무엇을 비워내는지는 그조차 알지 못했다. 그저 비우고 또 비워냈다. 그 끝에 다다라 발견한 것조차, 그는 비워내야 했다. 이대로도 좋지 않을까, 나도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은 오직 나와 달님뿐이니, 다시 흩날려 사라질지언정 지금만큼은, 그런 생각을 해도 되지 않을까. 저조차도 모르고 있던 한 줌의 작디작은 바람은, 눈앞을 물들인 핏빛 광경에 헝클어져, 종래에는 결국 비워내야만 했다.
손에 묻은 피가 너무 많아서, 그는 감히 자신의 행복을 바랄 수가 없었다. 단 한 번도 삶을 살아가며 후회해본 적이 없었는데. 그저 일과였고 그것에 감정이 끼인 적은 없었는데. 자꾸만 제게 온기를 실어오는 남자가 저를 그렇게 만들었다. 제 생애를 후회로 점철시켰다. 켄마는 창틀에 팔을 괴고 불어오는 여름밤의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제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이 모든 죗값을 갚은 후에는, 그때는 내 생각을 해도 되지 않을까, 하고 작게 비는 것뿐이었다. 그저 혼자만의 생각이라 자위하며, 작은 물음으로 빙자하여, 그는 그렇게 빌고 또 빌었다.
“바보같이, 무얼 하고 있는 거람.”
잠이나 자자. 간신히 사념을 털어내고 다시 자리에 누우려는 그때, 바람을 타고 날아온 익숙한 향이 켄마의 예민한 후각을 자극했다. 조금 시큼하면서 달콤한 향, 그리고 매캐한 화약 냄새. ‘지고쿠’의 닌자들만이 사용하는 수면향과 폭렬탄의 냄새였다. 삽시간 닌자의 오감이 날카롭게 일어났다. 한껏 젖어있던 감상을 단숨에 지워내고 본능적으로 움직인 그의 눈이 한곳을 향했다. 쿠로오 테츠로, 서북의 노헤비가와 사이가 좋지 못한 장원의 주인. 그리고 서북엔 제가 소속되어있던 닌자 유파 ‘지고쿠’가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순간, 매서운 눈빛으로 몸을 벌떡 일으킨 켄마는 닌자 시절에나 가능했던 최대한의 속도를 내어 테츠로의 방으로 달렸다. 안돼, 제발!
“누구냐!”
테츠로는 침상을 뚫고 들어온 검을 간신히 피해낸 뒤,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쳐 탁상에 팔을 짚고 바로 섰다. 잔뜩 들이킨 수면향이 그의 머릿속을 진탕으로 만들어 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웠다. 님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잠을 이루지 못한 것이 그를 살렸다. 잠들어 있었더라면 단칼에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헐떡이는 숨을 내뱉자 바깥에 가득 찬 폭렬탄 소리가 그의 귀를 따갑게 울렸다. 그는 팔을 베여 피를 적잖이 흘리는 와중에도 부디 제 소년이 무사하기를, 이 소리를 듣고 달려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언제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현실은 그에게 가혹했다.
“영주!”
“오지 말거라.”
“영주, 피가,”
“나가!!”
기어이 나타난 노란 머리의 소년이 그를 향해 다가왔다. 손을 내저으며 거부해도 소년은 개의치 않고 한달음에 달려와 그의 팔을 붙들었다. 왜, 대체 왜 너는. 말을 이리도 듣질 않아. 테츠로의 애원을 무시하며 곧장 그의 앞을 막아선 켄마가 검을 들고 노려보는 닌자를 경계했다. 무기도 없는 맨손이면서 기백만큼은 가히 모자람이 없었다.
“내가 누군지 알 텐데.”
“그저 임무를 수행할 뿐이다.”
“내가 누군지 알면 네 임무가 실패할 거라는 것도 알 텐데.”
닌자는 말없이 검을 겨누어 켄마의 목을 노리곤 침착하게 발을 놀리며 다가왔다. 테츠로가 덜덜 떨리는 팔을 들어 제 앞에 선 소년의 어깨를 잡고 저지해보려 해봤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는 그저 제 영주를 뒤로 밀어둔 뒤 발을 박차며 앞으로 쏘아져 나갈 뿐이었다.
닌자와 켄마 사이에 여러 차례 공방이 오갔다. 같은 유파 출신이라 같은 무술을 쓰는 그들은 좀처럼 어느 한 명이 승기를 잡지 못했다. 그럼에도 기술적 우위는 켄마에게 있었다. 어느새 벽에서 빼든 장식용 검으로 닌자의 검을 찍어 누르던 켄마는, 옆구리로 날아오는 발을 피하며 빙글 돌아 닌자의 뒤로 넘어갔다. 곧바로 치켜든 켄마의 검이 닌자의 뒷목을 노리며 쇄도했고, 허리를 꺾어내듯 회전한 닌자가 검의 손잡이를 들어 가까스로 공격을 막아냈다. 자세 때문인지 확연히 힘에 부친 그의 검이 부들부들 떨리며 켄마의 검에 짓눌려 점차 내려가기 시작했다. 강렬한 힘 싸움에 쇠끼리 긁히는 소리가 방안을 가득 메웠고, 결국 닌자의 검이 스스로의 목에 닿기 직전이었다.
그때, 별안간 닌자가 눈을 번뜩이며 작게 웃음을 흘렸다. 일순 켄마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주변의 배경이 전부 흐릿해지며 오직 닌자의 웃음 가득한 눈만이 보였다. 실전이 너무 오랜만이었나보다, 하고 자조 섞인 자책이 찰나에 흘러갔다. 제가 몸담고 있던 곳의 수법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다시 초점이 뚜렷해지고 감각이 생생해진 순간, 켄마는 닌자의 목으로 빠르게 박혀 들어가는 검을 놓아버리고 본능적으로 몸을 던졌다. 제 목을 내어주면서까지 단도를 꺼낸 닌자가 목표하는 것. 나의 영주, 쿠로오 테츠로.
푸욱-
익숙한 파열음이 들려왔다. 뒤이어 바닥에 쿵, 무언가 떨어지는 소음도 들려왔다. 닌자가 쓰러지는 소리에 안도하며 힘겹게 고개를 든 켄마는 불타는듯한 쓰라림이 느껴지는 제 어깨를 바라보았다. 고작 두 뼘의 차이로, 단검은 테츠로의 심장이 아닌 제 어깨에 박혀 있었다. 아, 다행이다.
“의원!! 당장 의원을 불러라!!”
“켄마! 켄마! 안 된다. 어째서, 왜, 대체 네가 왜!!”
켄마는 정신없이 저를 붙들고 엉망으로 말을 쏟아내는 그를 향해 웃어주었다. ‘지고쿠’ 출신인 그는 알고 있었다. 제 어깨에 박힌 단검에 극독이 발려있을 것이고, 그것은 머지않아 제 숨을 앗아갈 것이다. 켄마는 태어나 처음으로 깊은 안정감과 환희를 느꼈다. 살렸어, 내 영주를. 그는 새벽달 아래에서 비워내고 또 비워냈던 순간이, 이때를 위함이었다고. 비로소 죗값을 갚아, 이제는 홀가분히 꿈을 꿀 수 있겠다고. 진심으로 기뻐했다.
“안 돼, 안 돼, 아, 제발... 켄마 제발!”
“왜 울어?”
“말하지 말아라, 피가, 피가,”
“울지마, 쿠로.”
눈물을 가득 쏟아내는 남자의 검은 눈이 애처로이 빛나다, 처음으로 불려진 제 이름을 듣고 잔뜩 커졌다. 눈꺼풀의 움직임을 따라 물방울이 후두둑 떨어져 새하얀 이마를 적셨다. 켄마는 제 얼굴로 쉬지도 않고 떨어지는 눈물을 느끼며 작게 웃었다. 이게 맞는 일이다. 저는 이렇게 그를 살리고, 조용히 스러지는 게 맞았다. 감히 행복한 미래를 그려선 안 되었다. 켄마는 맞닿은 그의 가슴팍에 애정을 가득 담아 얼굴을 비볐다.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리는 팔이, 작은 소년을 감싼 그의 온몸이, 비탄을 뿜어내며 애통하게도 울었다.
“왜 그랬어, 대체 왜 네가, 왜,”
“좋아하니까.”
“...켄마.”
“한 번도 말한 적은 없지만, 사실 많이 고마웠어.”
살려준 것도, 거두어 준 것도, 지치지 않고 품어 온기를 전해준 것도, 끝없이 애정을 퍼부어준 것도. 전부 하나같이 고맙지 않은 게 없었다. 켄마는 울컥대며 올라오는 핏덩이들을 겨우겨우 삼켜내며 가까스로 괜찮은 척 말을 이었다. 당신을 친애해.
“그럼 가지 말아라. 제발, 곧 의원이 오니 조금만, 부디 조금만 더,”
“행복하게 살아야 해.
“그만, 더는 말하지 마!!”
“따라올 생각 말고 끝까지 행복하게 잘 살다 와, 알았지?”
사내가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제발 그러지 마. 날 떠나지 마. 켄마, 제발. 눈물은 끝도 모르고 흘러나와 그들의 사이를 흥건히 적셨다. 켄마는 제 뺨을 감싼 커다랗고 온기 가득한 손에 얼굴을 묻으며, 그를 마지막까지 바라보았다. 다시 눈꺼풀을 열고 나온 검은 눈동자가, 그의 마지막을 고스란히 담아내었다. 그는 테츠로를 향해 옅게 웃어주었다. 그래도 당신이 그려준 미래가 퍽 달콤했어. 덕분에 잠시나마 주제도 모르고 행복했어. 내게 사랑을 가르쳐줘서, 고마워. 전해지지 않을 말을 속으로만 되뇌이며 켄마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는 홀가분했다.
그리고, 조금은 서글펐다.
*
아, 아아- 눈물이 터져 나왔다. 새하얀 침대 위에서 눈을 뜬 켄마는 저도 모르게 솟구치는 애통함에 가슴을 쥐고 꺽꺽대며 숨넘어갈 듯이 울어댔다. 멍청이, 왜 그랬어. 끝의 순간 자신이 떠올렸던 생각들이 잔상으로 남아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꿈에서 깸과 동시에 그는 모든 기억을 되찾았다. 멍하니 그것을 곱씹으며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정신없이 오열하던 켄마는, 불식 간에 몸을 일으켜 잠옷을 입은 채로 집을 뛰쳐나왔다. 홀린 듯 옮긴 발걸음은 그를 익숙한 장소로 데려가 주었다. 본능적으로 찾아간 곳은 모든 운명이 시작된 장소, 느티나무 아래였다. 그리고 마침내 높이 솟아올라 언제나처럼 가지를 늘어뜨린 나무를 마주한 순간,
“아-”
켄마는 힘이 풀려 주저앉을 것 같은 다리를 애써 일으켜야 했다. 슬리퍼를 짝짝이로 구겨 신고 급히 달려 도착한 느티나무 아래에, 그가 있었다. 마치 마법처럼, 익숙한 뒷모습이 그의 눈에 박혀 들어왔다. 설명할 수 없는 비현실감이 다시 한번 그를 덮쳤고, 켄마는 벅차오르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울렁이는 눈동자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인기척을 느낀 그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
“.........”
생을 넘어 돌고 돈 둘은 이제야 서로를 진실로 마주할 수 있었다. 한참을 우두커니 서서 멍하니 바라보던 켄마는 자석에 이끌리듯 그를 향해 걸었다. 두방망이질 치는 가슴이 그의 온몸을 울렸고, 마침내 테츠로의 앞에서 비로소 익숙한 거리감을 되찾은 그는, 마치 준비라도 한 듯 입을 열었다.
“그래서, 잘 살았어?”
“응, 네가 항상 내 곁에 있었으니까.”
테츠로는 작게 웃었다. 보자마자 묻는 것의 내용이 퍽 그다웠다. 그는 사랑스러운 제 연인을 내려다보며 되찾은 기억 속 작은 조각들을 떠올렸다. 테츠로는 죽지 않았다. 혹여나 따라가면 원망하며 저를 봐주지도 않을까 두려워 꾸역꾸역 살아냈다. 따라 죽고 싶은 순간이 수도 없이 많았지만 버티고 또 버텼다. 그는 그럴 때마다 장원 내 가장 양지바른 곳을 찾아가 시간을 보내곤 했다. 제 유일한 연정이 묻힌 곳. 사랑스러운 뺨처럼 봉긋 솟아올라 봄에는 꽃을 피우고 여름에는 푸릇하게 빛내며 저를 반기던, 켄마의 안식처. 그는 매일매일을 그곳에 가 들꽃을 따다 주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건네며, 홀로 그를 추억했다.
“장가는, 갔어?”
“아니, 너 다시 만날 때까지 기다렸어.”
그러면서 그는 말간 웃음을 지었다. 언제나 저를 보고 짓곤 하던 그 다정한 미소가 켄마를 속절없이 무너뜨렸다. 또 한 번, 감정이 솟구쳐 눈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한 여름밤의 비처럼 주룩주룩, 멈출 기색도 없이 한참을 내렸다. 죄책감, 설움, 후회, 그리고 선연한 애정. 그 모든 것이 가득 담긴 탄식이 눈물이 되어 뚝뚝 떨어졌다. 테츠로는 그런 켄마를 안쓰럽게 바라보다, 물줄기가 흥건한 볼을 쓸어주며 옅게 웃었다.
“잘 살라고 해서 끝까지 너 안 따라가고 잘 살았어.”
“끄윽, 윽, 흐-”
“그리고, 다시 만날 날만 기다렸어. 나 잘했지?”
여전히 애매한 길이의 노란 머리칼을 가진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마다 보이는 깊은 곳의 검은 머리칼이 꼭 옛날의 그 어느 날을 떠올리게 했다. 테츠로는 한 발자국 더 깊게 나아가 작은 몸을 품에 끌어안으며, 그때와 같이 작게 삐져나온 검은 머리칼에 입을 맞추었다.
“그럼 이제 나 책임져줘야겠다 켄마.”
켄마는 눈을 질끈 감았다.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가 머리 위로 내려앉아 그때처럼 그의 온몸을 간질였다. 그때는 두려워 받아들이지 못했던 설렘이, 자꾸만 그를 잠식해 끝내 그를 주저앉히고 패배시켰다. 켄마는 그제야 되찾은 행복을 깊이 느끼며 작게 소리를 내었다. 겨우겨우 입 밖을 빠져나간 다 스러져가는 말이, 마지막 힘을 내어 테츠로의 귓가에 닿았다.
“좋아.”
끝내 서로를 잊지 못한 연인의 못다 한 인연이, 기어코 다시금 이어졌다. 이제는 자유로이 꿈을 꿀 수 있는, 여름이 만연한 밤이었다.
인연 ; 運命(운명)
#후기
평소 쿠로켄을 좋아하면서도 연성은 잘 못했는데 이번 기회에 합작에 참여해 예쁜 글을 쓸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동양풍도 찌통 분위기도 전부 처음 도전 하는거라 조금 어설프지만 예쁘게 봐주세요!ㅎㅎㅎㅎ 부디 읽으시면서 즐거우셨으면 좋겠고, 제 부족한 글 읽어주신 여러분 모두 정말 감사드립니다!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