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달맞이꽃- 기다림, 소원, 말 없는 사랑
by. 날아라멧쥐(@mikoomiki)
청춘예찬(靑春禮讚)
1.
쿠로오 테츠로는 속마음을 꾹꾹 숨기진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는 사람이었다. 코즈메 켄마는 그런 쿠로오를 잘 알았다. 그런 그가 자신에게만 속을 모두 내비친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자신의 사랑에 단념했다. 오직 저에게만 투명한 내면은 저를 향한 로맨틱을 품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켄마에게는 있었다. 코즈메 켄마는 외향적인 누구와 달리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이면을 잘 내비치지 않는 편이었다. 그건 정애가 향하는 사람에게도 다르지 않았고 따라서 여지를 주지 않았을 뿐 겉잡을 수 없이 커진 마음이 있었다. 바다의 심연에 내려앉은 햇빛처럼. 아주 천천히, 느리게, 여리게, 영역을 넓혀나가는 숨을 쉬는 사람으로서 이해 받아야 마땅한 마음 이야기다. 하지만 본디 심해란 바다를 탐험하는 호기심 많은 이로 인해 그 속이 모두 까발려지는 법이다. 그런 자는 흐름에 떠밀려온 물고기일 수도 있으며, 밝음에 지쳐 어두움을 찾은 정체불명의 생명체일 수도 있고 사고로 가라앉은 거대한 배의 잔해일 수도 있다. 켄마는 그 사실을 간과했고, 그가 가진 잔잔한 사랑의 형적과 현재진행중인 미화된 기억들이 한 탐험가에 의해 샅샅이 수면 위로 드러날 것이라고는 괘념조차 하지 않았다. 탐험가의 정체에 대해 호기심을 가질리는 더더욱 없었으며.
2.
내 생각에 그대는 늙지 않으리라.
내가 처음 그대의 얼굴을 보았을 때와 같이
지금도 아름다우며, 추운 겨울 세 번이나
나무 숲에서 여름의 자랑을 흔들었으니.
“감성적이네.”
켄마는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작품 소네트를 훑어내려 가다가 몽환적인 단어들로 가득 찬 대목에서 멈춰섰다. 늙지 않으리라.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 늙음을 무시하는 건 아니나, 그럼에도 사랑하는 이만은 평생 청춘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지나온 세월을 담아 꾹꾹 눌러쓴 문장임이 명명백백했다. 국어사전에서는 청춘(靑春)을 ‘새싹이 파랗게 돋아나는 봄철,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에 걸치는 인생의 젊은 나이 또는 그런 시절을 이르는 말’ 이라 뜻매김하고 있다. 사람의 삶은 새싹이 돋아나는 시기가 정해져 있지 않아 제각기이다.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에 걸친다고는 하나 실제로 사람들은 오십 대가 넘어도 청춘이네~ 와 같은 말을 즐겨 내뱉는다. 도쿄의 밤거리를 걷는 삶의 여행자들은 시간에 대한 아주 꽉 막힌 정의않고 각자가 생각하는 만큼이 그 자의 청춘이라 예찬한다. 자취방에서 드러누워 SNS를 하며 예찬하는 여행자도, 이자카야에서 여러 명의 동기들과 맥주를 신나게 들이키며 예찬하는 여행자도, 심지어는 보기 싫게 군데군데가 지저분히 벗겨진 갈매빛의 바닥을 딛고 옥상에 서 있는 여행자도. 자신의 봄은 보지 못했으나 다른 이의 봄은 찬란하리라 믿으며 고독한 모두의 청춘을 예찬한다. 뭐, 그래도 저마다의 봄을 지나 여름에 도달하지 않은 이가 타인의 봄이 훌륭하다 말할 수는 없다. 청춘을 아직 지나지 않아 머무르는 중에 있다면 그 후의 시간이 어떠한지 어찌 알겠는가.
‘아프니까 청춘이다’
켄마는 아직 청춘에 머무르고 있지만 그 말이 틀렸다고 굳게 믿었다. 분명 지금 자신이 아프고, 청춘인 것도 맞지만, 그 주위에는 아프지 않은 청춘에 머무르는 사람도 많았기 때문에. 예를 들면 쿠로오 테츠로처럼.
소네트는 아름다움으로 만연한 글이다. 저자는 이미 삶의 모든 계절을 끝내 이 세상에 없지만 켄마는 생각했다.
좋겠다. 어떻게 고백할지, 그런 고민은 없겠어.
문득 중얼거린 말을 다시금 되새기고 이상함을 느꼈다. 마치 저는 어떻게 고백할까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읽고 있던 페이지에 책갈피를 꽂고 쪽수를 다시금 눈에 새겼다. 양장본이라 표지가 꽤나 육중했다. 가지런히 덮어 책상 한 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고백이라니 얼토당토않은 소리다.
애초에 내가 들어갈 공간은 이미 정해져 있었잖아. 그런 걸 꿈꿀 새가 어디 있어.
······ 그렇지. 정해져 있었지. 생일 파티를 가도, 어디를 가도. 쿠로한테 나는. ··········
친구였으니까.
기분이 축축하게 가라앉았다. 쿠로오는 인기가 많은 사람이다. 성별을 따지지 않고 모두와 두루두루 어울려 지낸 덕분에 행사가 있다하면 만나고자 찾아오는 지인도 적지 않았으니 말 다했다. 그럼에도 봄고나 인터하이에서 응원단이 없었던 건 무엇인지 전부터 궁금했다. 자신은 아니라도 네코마 고교 배구부 부원 중 대부분의 교우관계가 좋아 입부하고 나서 자연히 배구할 때 사람들이 많이 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예상과 다르게 1학년 첫 대회에서 몇 명 오지 않아서 당황했던 기억이 뚜렷했다. 응원단이 온 적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었다만 타교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텔레비전 너머로 보았던 미야기 현의 시라토리자와 학원과 아오바죠사이 고교, 이나리자키 고교 등등을 예로 들면 확연히 차이가 드러난다. 이불 속에 웅크린 채 몰입해서 보던 날이었다. 타 배구부의 기술이나 시선 처리를 기억해두겠답시고 보기 시작했지만 결국은 빨려들어갈 듯이 화면을 바라봤다. 소리는 현장에서 스피커로, 또다시 귀로 전해지며 줄어들었을 텐데도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동시에 위압감이 굉장했다. 미간을 찌푸리면서 리모콘의 소리 줄이기 버튼을 다섯 번 연속으로 눌렀었다. 급하게 누르느라 손가락이 삐끗 다른 곳을 눌러 채널이 돌아갔다.
그랬지.
옆에는 쿠로도 함께였고.
가슴에 아로새겼던 순간들을 회고하다 사고가 주춤했다. 알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까지일 줄은 몰랐다. 곁에 늘 쿠로오가 있었다.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정작 속으로 삭히며 감정이 타들어가는 건 켄마인데도. 사랑을 고해하기만을 고대하며, 켄마가 저로 인해 변해가는 모습을 관망하는 듯이 옆에 서서 빙그레 웃고 있다.
늘.
늘.
정말로, 항상. 켄마의 옆에는 ‘쿠로’가 있었다.
······그렇게 따지면 나도 쿠로 옆에 붙어다녔잖아. 별 거 아니야.
어설프게 이질감을 방과했지만 켄마의 속은 여전히 울렁거렸다. 쿠로는 그런 거 아니야. 아닌데. ······고등학교 2학년씩이나 되어서 이게 무슨 상사병이야, 별 일이다. 또 유난이지.
의자에 앉아 멍하니 바라본 하늘은 제 마음을 어설프게 위로하기라도 하는지 어제와 다르게 회색빛이다. 드리운 자욱한 먹구름에 닿을까 싶어 손을 뻗었다. 그리고 나지막이 말했다.
이렇게 괴로울 때는.
차라리 네가 속 시원히 답해주면 더 괜찮아지지 않을까.
3.
“켄마! 왔어?”
“응. 왔네. 내가 어쩌다가.”
“에이, 그러지 말고 이 쿠로랑 같이 잘 해보자. 응?”
“쿠로도 답지 않게 웬 요리야? 요리는 아닌가. 어쨌든 지금까지 이 정도로 발렌타인을 챙기지는 않았잖아.”
“주고 싶은 사람이 생겨서. 너도 잘 아는 사람이야.”
“나도 잘 아는 사람?”
“응. 주면 엄청 좋아할 텐데, 그래도 싫어?”
“······ 하아. 이번 한 번만이야.”
고마워 켄마-. 쿠로가 켄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 흐트러져. 쓰다듬지마 쿠로. 켄마는 정이 없다. 정이 없어. 시끄러워. 목소리를 잔뜩 낮추고 어깨를 오므린 채 신경질적으로 쿠로오 쪽으로 돌아봤다. 너 때문에 심란해 죽겠는데 그만 좀 하라는 의미였다. 당연히 쿠로오는 알 턱이 없었다. 알고 한 행동이었다. 오히려 모르니 다행이었다. 얘 성격에 안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치근덕댈 사유가 더 늘 뿐 아니야? 괜히 논점을 흐렸다. 실은 정말 쿠로오가 어찌할 지는 몰랐다. 그런 이야기를 나눈 적은 그렇게 많지 않았기 때문에 켄마는 사랑에 빠졌거나 사랑에 대응하는 쿠로오를 알 수 없었다.
“그럼 시작해볼까.”
“······”
켄마의 입술은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쿠로오는 그에 개의치 않고 앞치마를 둘러주었다. 켄마 손 빼. 앞치마의 팔을 넣는 부분으로 손가락부터 찬찬히 집어넣었다. 능숙하게 줄을 빼서 켄마의 허리에 꽉 매주는 손길이 너무 섬세했다. 지나치게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그리고 그에 익숙하게 팔을 드는 켄마 자신도 낯설었다. 언제부터 일상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아마 처음부터이리라고 서투르게 넘겨 짚었다.
애인한테 하던 대로 하는 거겠지. 쿠로는 인기가 많은 사람이니까. 이번 초콜릿도 친구한테 주는 걸거야. 발렌타인이라고 수줍어하며 좋아하는 사람한테 고백이라니 쿠로가 그럴 위인은 아닐걸.
켄마는 잠시 아랫입술을 지긋이 윗니로 눌렀다. 그럴 위인은 아니라 했지만 사람은 변한다. 저부터가 쿠로오로 인해서 많이 달라졌고, 사실 상상 속의 주인공이야말로 가장 굴곡진 변화를 겪으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초콜릿을 건네며 “좋아해” 라고 말하는 쿠로오도 아주 생뚱맞은 상상은 아니다. 바로 몇 초전 생각한 것이 증거였다. 사랑에 빠진 소꿉친구에 코즈메 켄마는 깜깜하다. 그런 건 그가 볼 수 있는 관할이 아니다. 괜히 스스로 무덤을 판 듯한 느낌이 들어 속이 텁텁해졌다. 내가 볼 수 있는 관할은 어디까지일까. 쿠로가 나한테 보여준 만큼 아니야? 뭐하러 고민하고 있어. 그게 쿠로의 전부인데. 그치만 쿠로의 생각이 아닌 행동을 포함하는 영역도 ············.
“켄마. 무슨 생각해?”
“응?”
“아까부터 앞치마에 튀고 있어.”
“?”
“튀기는 뭐가 튀어” 라고 톡 쏘아주려고 앞치마를 봤더니 정말 난리도 아니었다. 온데군데 다 튀어 갈색으로 범벅졌다. 더군다나 노란 색인데 만사와해네. 어차피 제 물건은 아니지만 켄마는 그런 이유로 책임을 외면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쿠로, 미안해. 다 만들고 나서 내가 세탁하고 갈게... 대식하며 켄마가 응얼거리자 쿠로오가 옷을 툭툭 털어내며 걱정말라 서그럽게 굴었다. 평소 곰살맞은 성격 어디 안 간다. 켄마는 쿠로오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 사람은 누구한테 얼마나 더 이런 식으로 말했을까? 어떤 온도로 숨을 내쉬었고 간격을 얼마나 두어서 대화했을까? 알 필요 없고 알고 싶지도 않으며 알고 싶어진대도 저가 알 수 없다는 이유로 회피해왔던 가슴에 도사린 궁금증들이 자꾸 고개를 빼꼼거렸다. 스스로를 지탄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은 어깨를 두드리는 이 사람을 보며 제 가슴이 떨려오는 까닭이었다. 떨려오는 거야 하루이틀 일이 아니라 지금 이러는 것이 새삼스럽다 여기는 게 옳은 일일 터다. 그럼에도 말했듯이 이제 와 설렘에 새퉁스레 대응하는 건 아마도.
“켄마?”
사랑의 무게가 이로써 더 무거워져버렸기 때문임이 틀림없다. 이젠 정말 돌이킬 수 없이 깊어졌다. 이름을 부르는 것 따위에도 이토록 정신이 몽롱하게 들뜨는 건 도무지 어찌할 수 없다.
켄마는 문득 궁금해졌다. 쿠로오가 저리도 열렬히 구애하는(아마) 상대가 초콜릿을 먹어주지 않는다면 어떡하나. 함께 한 자신이 허무한 건 둘째 치고 쿠로오가 실연의 슬픔으로(기호에 안 맞아 초콜릿을 먹지 않은 걸 실연으로 받아들이기는 힘들지만 그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잠시 생각했다) 몇 날 밤을 엉엉 지새는 모습 따위는 죽었다 깨어나도 도저히 봐줄 수 없다.
“근데 걔가 초콜릿을 좋아하는 건 확실해?”
“어... 어? 그렇네. 뭐 어때, 좋아하겠지.”
퍽이나 태평하다. 이렇게 열심히 만들었는데 중간이 되어서 이런 질문을 들으면 힘이 빠질 만도 한데 어림도 없이 쌩쌩했다. 많이 좋아하는가보다. 전혀 아프지 않은 혼잣말을 웅얼이고 손에 쥔 양푼으로 신경을 옮겼다. 잡념을 없애겠다며 손을 휘젓다가 무의식 중에 하나를 더 생각했다. 어쩌면 그 사람이 저를 좋아한다 확신하나. 그러지 않고서야 싫어할 거라는 가정을 아예 하지 않는 건 힘들잖아. 자기가 주는 거라면 무조건 받아줄 거라는 자신이 있나봐. 그럴 만도 하지. 일단 나부터가···.
자존감도 높고 자신감도 있네. 켄마는 입꼬리를 올려 숨소릴 흘렸다. 입꼬리가 올라가며 자연스레 눈꼬리와 거리가 좁혀져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정오의 햇빛은 자비없이 쏟아져내렸다. 평소라면 너무 밝다며 커튼을 쳤을 사람은 짝사랑하는 남자 생각에 몰두한 상태였다. 자기애 적당하고, 몸도 좋고. 성격도 호탕하고. 친구도 많고. 운동신경도 좋고. 얼굴도 반반하고. 여러모로 복을 타고난 녀석······ 아니, 뭐래.
쿠로오가 복을 타고 났다니. 켄마는 몽상에 취해 헛소리를 내뱉은 자신을 마구 탓했다. 따지고 보면 그는 없던 복을 만든 셈이다.
4.
신년이 밝던 날이었다. 고교 1학년은 저물고 2학년이 되었다. 어제의 해가 지고 오늘의 해가 뜨는 걸 보고 있자니 느낌이 묘했다. 켄마는 혀를 달싹이며 무어라 말하려다 만 쿠로오가 신경쓰여 견딜 수가 없었다.
“할 말이 있으면 해. 눈치 보게 만들지 말고.”
“나 소원 있는데 뭔지 맞춰볼래?”
그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망설임 없이 답하는 그가 좀 귀여웠다. 장신에 거구의 외관상으로는 어딜 봐도 귀엽지 않은 그가 많이 귀여웠다. 그래서 더 매몰차게 말했다.
“아니.”
“한 번만. 응? 엄청 흔한 소원이야.”
“좋아하는 사람한테 고백이라도 할 셈이야?”
“헐. 어떻게 알았어?”
“············ ?”
황당하다. 쿠로가 연애에 아예 관심도 없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닌데, 이건 너무 갑작스럽고, 그보다 이걸 나한테 왜 얘기해? 같은 흐름이었다.
“잘 해봐.”
“그게 끝이야?”
“뭘 더 말해야 해?”
목도리에 낀 노란 머리칼을 바깥으로 빼내며 어깨를 으쓱였다. 너도 이제 날 떠나가는구나.
‘애초에 내 것이었던 적도 없지만.’
빙빙 몇 번을 반복해 둘러진 목도리 위에 닿을락말락하는 어중간한 길이의 머리칼이 바람에 살짝 흩날리며 탁하게 노란 빛을 잃고 주홍빛으로 반짝였다.
원하는 말이 있는 것 같긴 한데 잘 모르겠고 안다고 해도 해줄 마음은 없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연애를 한다는데 아무리 켄마라도 진심으로 응원은 무리다. ‘잘 해봐’ 정도야 어렵지 않다. 그러나 진심으로 어깨라도 두드려주며 조언해주길 바라는 거라면 당장 그 자리를 떠 버릴 거다.
쿠로오는 제 어깨 부근에 위치한 작은 소꿉친구를 빤히 바라보다가 그만두었다.
‘아직도 때가 아닌가······.’
신년이 밝았는데도 그 전 해와 같던 두 사람의 관계는 2월이 되어서도 진전이 없었다. 오가는 사랑은 없고 때를 기다리는 두 사람이 감정을 삼키는 시간만 속절없이 흘러갔다.
5.
“이게 뭐야?”
“뭐긴 뭐야. 초콜릿이지~”
“너랑 나랑 만든 거잖아. 이걸 왜 나한테 줘.”
“처음부터 켄마한테 주려고 만든 거였으니까?”
당혹스럽다. 이걸 왜 저한테 주는지 알 길이 없어 양손을 모아 초콜릿이 든 봉지를 떠받은 채로 건넨 이와 제 손에 들린 음식물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곤 돌직구로 물었다.
“너 나 좋아해?”
“좋아하지 그럼~”
죽여버린다 말하며 눈을 흘겼다. ‘너 나 좋아해?’ 라는 질문에 ‘좋아하지 그럼~’ 이라는 대답만큼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 수가 없다. 물은 자와 답한 자의 ‘좋아함’은 엇갈려서 다른 결말을 머릿속에서 도출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오늘도 켄마는 비참해졌다.
“잘 먹을게. 고마워.”
“그럼 잘 먹어야지. 누가 만든건데! 맛있게 먹···”
말이 끝나기 전에 두 사람은 헤어졌다. 한 쪽의 일방적인 이별이었다. 신나게 말하던 쿠로오는 두 손을 허리에 얹고 짝다리를 짚었다. 하아, 난감하네 정말. 좋아하냐고 해서 좋아한다고 했는데 또 뭐가 마음에 안 든 걸까.
이제 그만 혼자 생각하고 괴로워하지 말고, 나한테 직접 물어봐주었으면 좋겠는데. 이왕이면 그 답의 뜻도 혼자 추측하고 숨지 않았으면. 그래서야 지금 같은 상황이 벌어질 수밖에 없잖아.
‘켄마. 왜 다를 거라고 생각해?’
다를 바가 없는데. 두 사람은 사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한 번도 없으니 그만큼 백지에 새로 이야기를 써내려갈 수가 있는데. 켄마는 백지가 이미 다른 이야기에 덮혔을거라 짐작한 모양이다.
‘너답다고 해야할지. 너답지 않다고 해야할지.’
배구에 있어서는 머리 쓰는 데 비할 이가 없는 너지만 이번에는 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어, 켄마.
쿠로오는 오늘도 고백에 실패했다. 비참해진 두 사람은 비참하지 않을 내일을 그리며 바보 같이 얼굴을 볼 수 없는 이가 비참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빌었다.
요란하게 전화가 울린다. 켄마는 발신자에 컴퓨터 특유의 글씨로 쓰인 이름을 보자마자 받기 버튼엔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끊어버렸다. 몇 초 지나지 않아 또 전화가 온다. 두세 번 받지 않으니 그 뒤로는 조용했다.
이런 식으로 지내온지도 벌써 십사 일째다. 엇갈려가며 간극이 점점 커지고 있으니 대화를 하지 않고 그간 있던 일을 되새기며 마음을 정리하기로 결심한 것이 계기였다. 문제는 그가 마음을 정리하도록 놓아주지 않았다. 무슨 마음을 정리하는지도 모르면서 망할 운동선수로서의 본능이라도 있는지 조금이라도 현실에 냉담해졌다 하면 그로부터 온 메시지나 전화가 맥을 끊었다. 차라리 아예 무관심하거나 직접 집에 찾아왔다면 나을 터인데 그런 건 또 아니었다. 전 같았으면 왜 그러냐며 한두 번쯤은 집에 찾아왔을 사람은 어째서인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텍스트로만 뻐끔뻐끔 대화를 시도했다.
‘어이가 없어, 진짜······.’
그렇게나 잘 끊어내는 너면서 왜 나에겐 이렇게 무른 걸까. 그렇게나 사람을 쥐고, 흔들고, 어느 순간 제 것으로 만드는 너면서 왜 나만 이렇게 대해. 너무 소중해서 잘못 하면 상처 받을까 걱정하냐고. 자꾸 네가 그러니까,
‘내가 특별한 사람인 것 같잖아.’
본래도 평일과 휴일 합해 4일 이상은 종일 집에 있는 켄마지만 막상 작정하고 밖에 나가지 않으려니 하는 일에 쉽게 질렸다. 손에 잡은 게임은 대부분 세 시간이 지나지 않아 엔딩이 났다. 설상가상 번뇌와 장시간 화면을 들여다 본 결과로 머리가 아파왔고 배는 고프지 않았다.
또 어쩔 수 없나?
켄마는 너무나 지루해보이고 저와도 맞지 않으리라고 확신해 선물 받았지만 한 번도 읽지 않았던 책을 꺼냈다. 누가 주었더라 한참 더듬었더니 초등학교 사학년 때 제게 곧잘 말을 걸던 키 154cm의 소년의 흐릿한 얼굴이 그려질듯 말듯 했다. 생일 선물··· 은 아닌 것 같은데. 누가 사학년짜리한테 로맨스 소설을 생일 선물이라고 줘······. 아, 줄수야 있겠지만 내 취향이 아닌 걸 모르지 않았을 텐데 왜 굳이······.
당시에는 표지만 봐도 별로임을 직감했음에도 ‘준 사람의 성의가 있는데’하고 억지로 책장을 넘겼다. 사람을 싫어하는 주제에 사람을 놓지 못했다. 의리로 시작된 독서는 이십 분을 못가 흐지부지 실패했다. 꽤 유명한 작가인데다 글도 재밌었다. 그러면서 모순적으로 읽기를 그만둔 건 아무리 봐도 제 취향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독서로 문학적 능력이 늘어나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만 그닥 문학적 능력이 필요한 진로를 걷지 않을 터라 상관없었다.
“이제야 읽게 되네.”
고심해서 고른 선물일 텐데 그 마음을 외면한 제가 미웠다. 받은 사람도 죄책감을 느끼는데 이 사실은 안다면 그 소년은 얼마나 서운해 할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사죄의 의미로 켄마는 책의 공백까지 포함해 꼼꼼히 읽기로 마음먹었다.
수줍음을 많이 타던 아이가 무료하다 여겼던 단어의 배열은 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서 보니 정교하게 놓인 덫의 연속이었다. 센스 있다며 웃어넘긴 단어는 한 페이지가 지나지 않아 진의를 보였고 존재하는 까닭을 몰랐던 단어는 세 번의 이야기가 끝나기 전 존재의 까닭을 명확히 알렸다.
“재밌네.”
내용은 별로 유별나지 않다. 사실 문체 또한 태어나 처음 봤다 할 만큼 희귀하고 개성 있지는 않다. 그런 건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지금 이 글이 미치도록 끌린다는 사실뿐이다. 문학에 종사하는 사람은 낭만을 사랑하는 경우가 잦다. 낭만으로 완성된 아름다운 글은 이내 독자마저도 끌어들인다. 켄마가 바로 그 상황이었다. 손도 안 대던 타인의 사랑 이야기는 상상 이상으로 질척했다. 내리막길과 오르막길을 번갈아 걷는 주인공의 운명에 손가락이 안절부절했다.
로맨스 소설을 읽고 있으니 떠오르는 하루가 있었다. 중학교 3학년 켄마의 졸업식 날 쿠로오는 달맞이꽃으로 가득인 꽃다발을 선물했다. 꽃밭이나 산에 가면 쉽게 볼 수 있긴 하나 다발로 만드는 사람은 잘 보지 못했기에 켄마는 받으면서도 얼떨떨했다. 저를 닮은 노란 꽃을 한 아름 품에 안은 켄마에게 쿠로오는 이제 너도 고등학생이라며 능청스럽게 굴었고 그에 아직 고등학교 입학은 안 했다고 말했다. 그 대답에 쿠로오가 뭐라고 회신했던가. 그 순간만이 까맣게 공란으로 비워져 있었다.
중학교 3학년의 마지막 날 회상을 끝낸 켄마가 다시 소설의 201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놓치기라도 할세라 꾹 끼워놓은 손가락을 왼쪽으로 서서히 움직이니 글자들이 드러났다.
남자는 얼마나 잘근잘근 씹어댔는지 피딱지가 앉은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그러고는 그 손으로 꽃다발을 내밀었다. 이게 뭐죠? 신경질적인 연인의 목소리에 침으로 겨우 목을 축이며 천천히 말했다. ······달맞이꽃이요. 우리 연애 시작할 때 내가 처음 줬던 꽃이잖아요. 그러나 연인은 아무 말이 없었다. 달맞이꽃의 꽃말이 뭔지 알아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기다림이에요. 고요는 더 숨 막히게 굳어갔다. 말 없는 사랑. 뭔지 모르겠어요? 난 계속 기다려왔다고요. 당신이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는 날을. 아마 오늘은 그 날이 아닌 듯하고 앞으로도 오지 않을 것 같지만 난 기다려보려고 해요. 그러니 받아주세요, 부디 이 꽃을.
내가 당신을 너무 사랑한 탓에 뜻을 숨겨야했던 이 달맞이꽃을, 팔월 삼십일의 달 아래에서, 받아주세요. 그것이 거절의 뜻이어도 좋으니 이 사랑이 답문 없는 편지처럼 되지 않길.
······이상하다. 작가가 손끝으로 만들어낸 인물에 몰입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우스운데 켄마는 울면서 기다려온 시간을 담담히 고백하는 남자를, 자꾸 한 남자와 겹쳐보고 있었다. 이야기 속의 남자처럼 항상 곁에 있고 말을 걸으며 귀찮게 하는 주제에 과묵할 때를 알고 제 딴에는 별 뜻 없었을 행동 하나하나로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진절머리 나게 해놓고는 다시 두근거리게 하는
···············달맞이꽃을 건네던 남자.
쿠로오 테츠로와.
6.
화해는커녕 얼굴도 못 보고 한 달이 흘러 어느새 삼월에 접어들었다. 달력에 빼곡이 쓰인 스케줄들이 무색하게 쿠로오는 침대에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켄마 없는 일상은 황당하게도 고요가 없어 고요했다. 숨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좋았는데 쿠로오에겐 그것마저 허락되지 않았다.
“야, 전화 받아.”
“어라, 내 전화야?”
“켄마라고 쓰여있네. 그 작은 코즈메, 맞지?”
켄마가 전화를 다 하는구나. 웬일······어? ······아니, ·········어??
“어, 켄마······?”
-나와.
“엥, 어디로?”
-너희 집 앞이야.
“왜 거기 있어. 그보다 이렇게 갑자기 무슨 일”
-잔 말 말고 오라면 와.
진짜 무슨 일이래. 쿠로오는 방금 일어난 일을 믿지 못해 몇 번이나 옆의 친구에게 지금 나 켄마랑 전화한 게 맞냐고 물었다. 뺨을 한 대 맞고 나서야 현실임을 인정했다.
켄마 목소리를 한 달만에 들은데다 먼저 걸려온 전화라니 꿈을 꾸는 듯했다. 이미 외출복이라 쿠로오는 저녁은 미안하지만 내 집에서 먹겠다며 친구들에게 사과하고 집을 나왔다. 너 지금 저녁 식사 내기에서 네가 진 건 잊었냐며 추궁하는 목소리가 등 뒤로 시끄럽게 들렸다. 그런 일에 쓸 시간이 없어져서 말이야······ 나도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겠거든.
“켄마야?”
정말 켄마가 있었다. 집 앞에 아무도 없을 가능성을 미약하게나마 남겨두고 있었는데 이제는 붉게 타 사라졌다. 켄마가 있다. 얼마나 그리워하던 일인가. 붙잡았으면서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던 켄마는 익숙한 목소리에 바로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곧 기다리던 사람이 멀리서 뛰어왔음을 눈치 채고 머쓱한 표정으로 투덜거린다.
“뭐야······. 집에 있던 게 아니었어? 어쩐지 오래 걸리더라.”
“왜 부른 거야?”
“좀 무서운데. 천천히 하자, 우리.”
갑자기 또 웃는다. 종잡을 수가 없다. 넌 뭐가 그렇게 흥미로워. 난 초조하고 궁금해서 심장이 타들어가고 있는데.
“기다렸어.”
뭘.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보고 싶어지는 순간까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한 달이 지나서야 알겠더라.”
뭘 알아?
“바보 같이 오래도 기다렸네, 쿠로오 테츠로.”
내가 기다렸다고.
“기다린 거잖아. 오늘 같은 날이 오기를. 내가 먼저 너한테 다가와줄 날을.”
사고가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고 어지럽게 뒤엉킨다. 텁텁히 막혀오는 숨은 켄마의 선연한 눈을 보고 나서야 편해지기 시작한다. 지난 시간들의 켄마가 스쳐가며 눈앞의 켄마와 겹쳐진다. 무표정의 얼굴은 웃고 있는 켄마와 합쳐져 이내 화사한 빛을 내며 으스러진다.
혼자 예측하고 설레어하면 종국엔 쓰라림밖에 남지 않는다는 걸 다년간의 경험으로 알게 되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설레지 않으려고 했다. 뛰노는 심장으로부터 겨우 도찬했다고 생각했다. 멋대로 바보 같이 기뻐했다. 결국 애정에서 타피하는 일 따위는 할 수 없다고 깨닫는 날이 올 거라는 걸 알았는데도.
“참은 건 너뿐만이 아니니까 쌤쌤인 걸로 하자. 괜찮지, 쿠로?”
켄마가 노란 달맞이꽃의 다발을 안겨주었다. 그 날처럼. 코즈메 켄마가 중학교 3학년을 졸업하던 날 같은 꽃을 안기던 쿠로오처럼 다정하게 미소 지으며. 그 미소에 쿠로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켄마의 심연을 파헤친 것은 다름 아닌 몇 년전의 기억이었다. 어두운 심해를 노오란 빛깔이 헤집고 들어왔다. 의미를 몰랐던 몇몇의 순간들은 쿠로오가 준 꽃의 꽃말 하나로 깔끔히 정리되었다.
청춘은 결국 이렇다. 제 청춘이 한 편의 소설이라면 기는 열병의 발병이고, 승은 열병이 심해지며, 전은 열이 미친 듯 올랐다가 결은 병으로 사망임이 틀림없다던 코즈메 켄마의 사랑은 성공함으로서 열병은 완치되었다. 상사병과 정말 열병의 중간쯤에 걸친 켄마의 사랑은 같은 병을 앓던 이와 서로 치료해주는 결말을 맞았다.
그 영원의 시간에 달맞이꽃이 함께였다. 쿠로오와 켄마의 청춘 한 가운데 떡하니 위치해 속이 닳던 나날은 사랑이 성공(星空) 아래에서 성공(成功)하며 찬연함으로 일컫게 되었다. 펼쳐질 변치 않는 나날에 두 청춘은 여전히 오색영롱하리라 서물거리는 별들이 노래했다.
#후기
장황한 글이지만 잘 봐주셨다면 감사드립니다! 많은 분들이 함께하는 이번 합작에 참가하게 되어 영광이에요. 역시 쿠로켄은 공식 커플입니다... 다시 한 번 모자란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려요. 다들 몸 관리 잘 하시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