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니델피늄-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게요.
무제
by. 슬기(@HQ_seulgi)
* 청각장애가 생긴 켄마가 나옵니다
* 형식 주의
* 쿠로오와 켄마가 사귀고 있다는 설정입니다
01.
쿠로오는 코즈메를 좋아했다. 모두에게 살가운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코즈메를 유독 아끼는 게 티가 날 정도였다. 언젠가 쿠로오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코즈메에 누군가 폭력 현장이라도 일어나는 건가 핸드폰을 꺼내 들어 사진을 찍으려 했더니 쿠로오가 그 큰 손으로 조막만 한 사탕을 삐질삐질 까서 게임 중인 코즈메 입에 넣어주는걸 본 적도 있을 정도란다. 누군가 문득 언제부터 그렇게 코즈메를 챙겼어? 라는 질문에 잠시 고민하던 쿠로오는 자기도 모르겠다고 답했다. 매사 묵묵히 제 일을 해내는 켄마를 보면서, 뭐든 자신에게 좀 더 의지했으면 좋겠다-라는 어렸을 적의 아주 순수한 명분에서부터 비롯된 습관이란다. 그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쿠로오 테츠로는 섬세한 사람이었다. 180대의 비대한 신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꼼꼼한 성격으로 캐릭터 밴드부터 시작해 핸드크림, 과일 향 립밤, 생각 없이 입에서 굴리기 적당한 주전부리 등을 제 주머니 속에 잔뜩 챙겨놓고 꼭 무언가 심심할 때, 뭘 잊어버린 것 마냥 괜히 속이 찜찜할 즘 슬그머니 나타나 뭐든지 손에 꼭 쥐여준 채 특유의 능글맞은 웃음을 짓곤 했다. 특히 코즈메에 한해서는 유독 더 그랬다. 어째 본인보다 더 코즈메를 잘 챙기는 것 같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문득 누군가 코즈메한테 자꾸 왜 뭘 해줘? 라고 물었을 때, 잠시 멀뚱히 물음을 곱씹던 쿠로오는 꽤 복합적인 의미의 물음에 반해 아주 평범하고 명쾌하게 답했다. 켄마랑 나는 친구니까. 대답과 함께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시선을 돌리는 쿠로오에 코즈메는 찝찝하다는 표정으로 쿠로오를 쳐다봤고, 그 옆에 서 있던 야쿠는 징그럽네.라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리에프 역시 으, 쿠로오상 변태 같네요! 라며 거들었다 시끄럽다며 쿠로오가 던진 체육관 걸레로 얼굴을 맞았다.
비록 달가운 반응은 아니었지만 코즈메는 그런 쿠로오의 말에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딱히 반박할 필요가 없었다. 사실이니까. 쿠로오와 코즈메는 아주 친한 친구였다. 서로에게도, 객관적으로도. 물론 쿠로오는 보편적인 ‘친구’라는 개념보단 조금 과하게 코즈메를 감싸고 돌긴 했으나... 아무렴, 10년 이상을 함께한 둘에게 서로는 남들과 같은 개념으로 단정 지을 수 있을 만큼 가벼운 관계가 아니었으니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02.
그러던 중 사고가 났다.
딱히 이상했던 것도 유난히 특별했던 것도 하나 없던 아주 평범한 날에, 늘 그랬듯 부 활동이 끝나고 모두가 정리로 분주할 때 누군가 실수로 건드린 기어가 툭 빠지면서 선반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우연히 느릿하게 그 옆을 지나가던 코즈메 위로, 덜커덕 소리와 함께 선반 위에 올려져 있던 묵직한 박스들이 쏟아져 내렸다. 저 멀리 철제 선반이 기울어지는 걸 눈치챈 쿠로오가 뒤늦게 조심해, 켄마! 라며 소리쳤으나 코즈메가 고꾸라지는 게 더 빨랐다.
우당탕. 둔탁한 소리와 함께 한적한 체육관이 시끄러워졌다. 흩어져있던 모두가 다급하게 한목소리로 코즈메의 이름을 불렀다. 아릿한 두통에 머리를 붙잡은 코즈메는 눈가 위로 쏟아지는 뜨끈하고 끈적한 느낌에 제 이마에서 피가 흐른다는 걸 알았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모두가 멀뚱히 서 있던 사이, 가장 먼저 달려온 쿠로오가 코즈메 위에 쏟아진 비품 상자들을 걷어 올렸다. 이마를 붙잡은 채 몇 번 눈을 끔벅이던 코즈메는 저를 둘러싼 시선들을 애써 외면하며 몸을 일으키곤 느릿하게 대답했다.
“괜찮아요.”
코즈메가 피로 질척해진 눈가를 쓸어내곤 고개를 들었다. 찌푸린 눈을 바로 뜨자, 흐릿한 시야 너머로 보이는 모두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정적에 코즈메가 한숨을 뱉으며 다시금 괜찮아요.라며 대답했으나 고요는 깨지지 않았다. 그제야 코즈메는 무언가 잘못됐음을 알았다. 쿠로. 코즈메가 쿠로오를 불렀다. 쿠로오의 표정이 묘하게 위태로웠다.
쿠로?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 사고는 순식간이었다.
*
세상이 적막으로 가득 찼다. 의사는 충격으로 인한 쇼크라고 했다. 신경이 마비된 상태라 언제 돌아올지,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모른단다. 그 말에 코즈메의 부모님은 코즈메를 꼭 끌어안은 채 서럽게 울었다. 정작 코즈메는 썩 담담했으나 우는 부모님 앞에선 본인 역시 심란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건 고작 열여덟의 코즈메에겐 너무 가혹한 소리였다. 물이 들어 찬 듯 먹먹한 귀가 어색했다. 모두가 바쁘고 다급해 보이는 와중에도 제 주변만은 이상하리만큼 고요했다. 낯설다. 코즈메는 얇은 병원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
눈앞이 뿌옇다. 저도 모르는 새에 눈물을 흘렸겠거니 싶었다. 새하얀 병실의 벽과 아무것도 놓여있지 않은 작은 협탁은 그야말로 공허하기 짝이 없어 마치 고요로 가득 찬 코즈메의 세상에 기름을 붓는 듯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건 생각보다 고역이었다. 멍하니 앉아있더라도 삐걱대는 제 몸이 어색해서 손뼉을 두드리길 여러 번. 일부러 본래보다 소리 내서 말하기를 몇십 번. 답지 않게 알면서도 멍청한 짓을 몇 번 반복하고 나서야 코즈메는 허탈하게 웃었다. 제 이마에 붙어있는 거즈가 거슬렸다.
03.
"퇴원할래."
안 돼.
"안 아파."
그래도.
병원 심심한데. 다인실은 죽어도 안 간다는 코즈메를 배려해 잡았던 일 인실이지만, 정작 일 인실 조차 썩 맘에 드는 게 없었던 코즈메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제 앞에 내민 종잇장을 노려봤다. 시끄러워. 단호한 글씨체만큼이나 완강한 거절에 뒷말을 거둔 코즈메는 병실 구석의 작은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흐릿한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 마냥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밖에도 못 나가겠네. 감옥에라도 갇힌 마냥 답답한 기분에 미간을 구긴 채 요리조리 눈을 굴리던 코즈메는 제 어머니가 남기고 간 종잇장을 바라보곤 펜을 꺼내 시답잖은 것들을 끄적이기 시작했다.
다들 집에 잘 갔으려나. 코즈메가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던 터라 모두가 혼란스러워하던 와중에도 저만 멀뚱히 서 있던 것이 생각났다. 당황한 상태에서도 저를 부축해 줬던 야마모토한테도, 피를 보곤 저가 더 창백하게 질렸던 이누오카한테도 이젠 정말 괜찮다고 말해야 하는데.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사이 제 옆에 느껴지는 인기척에 코즈메가 천천히 고개를 들자, 아주 익숙한 얼굴이 그를 마주하고 있었다.
"어, 쿠ㄹ..."
반가운 제 소꿉친구의 등장에 꽤 들떠있던 코즈메의 목소리는 시선이 따라 움직임과 동시에 끝을 맺지 못하고 뚝 끊어졌다. 쿠로오를 향하던 코즈메의 손은 둘의 눈이 마주친 순간 갈 곳을 잃고 허공을 휘저었다. 뭐야. 코즈메의 눈동자가 당황스러움으로 가득 찼다. 병실 안에 어색함이 맴돌았다. 정적 후에, 바짝 마른 입술을 달싹이던 코즈메가 먼저 입을 열었다.
“.. 울어?”
쿠로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론 코즈메가 대답을 들을 수도 없었을 테지만. 어렸을 적, 배구 클럽에서 참패를 당한 후 분함에 울먹이던 쿠로오를 제외하면 코즈메는 쿠로오가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우직하게 자란 쿠로오는 썩 감수성이 풍부한 편도 아니었으며, 무엇보다 쿠로오의 한결같은 일상엔 눈물을 흘릴 만큼의 감정 소모가 필요한 일이 거의 없었기도 했음에. 그런데 지금은. 제 눈앞에 서 있는 쿠로는. 축축하게 젖어 든 쿠로오의 속눈썹과 붉게 짓무른 눈가는 울다 못해 한참을 오열하고 온 사람과 같았다. 코즈메가 재차 쿠로오를 부르며 눈치를 살피자, 그제야 쿠로오는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애도 아니고. 머쓱해진 코즈메가 중얼거렸다.
미안해
쿠로오가 느릿하고 정확한 입 모양으로 대답했다.
***
실려 나간 코즈메를 뒤로한 쿠로오는 그 상태로 굳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뒤늦게 켄마를 부축하고 돌아온 야쿠가 너 괜찮냐? 라고 물었음에도 어, 어. 라는 형식적인 대답만 뱉었을 뿐 코즈메가 실려 나간 방향만을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모두가 코즈메를 둘러싸고 괜찮냐는 말을 건넬 때, 쿠로오만이 묘하게 코즈메의 시선이 어긋남을 알아챘다. 코즈메를 짓눌렀던 비품 상자를 들어 옮긴 뒤, 코즈메를 살피던 쿠로오는 두서없이 내뱉어지는 코즈메의 말에 꽤 큰 목소리로 코즈메의 이름을 불렀다. 코즈메는 얼굴을 찌푸린 채 눈꺼풀을 끔뻑댈 뿐, 대답이 없었다. 눈을 맞춘 쿠로오는 다시금 코즈메의 상태를 살폈으나 역시 이마가 찢어진 것 외의 특별한 외상은 없었다. 그런데 왜. 이상하게 등골이 서늘했다. 초점이 풀린 코즈메의 눈동자가 방황했다. 코즈메의 어깨를 붙잡은 쿠로오가 물었다.
"켄마, 나 잘 보ㅇ..."
"괜찮아요."
에.
쿠로오의 입에서 바보 같은 탄식이 튀어나왔다.
"내 목소리 들려? 이마 빼고는..."
"괜찮아요."
“.......”
“쿠로?”
다쳤구나.
04.
사고 이후부터 쿠로오는 병실에 출석 도장을 찍었다. 매번 손에는 온갖 선물들을 바리바리 싸 들 은 채로. 코즈메는 쿠로가 이렇게 한가한 사람인 줄 몰랐다며 타박했으나 쿠로오는 능청스럽게 코즈메의 옆자리를 꿰찼다. 입원했다고 게임기만 붙잡고 있지 말라는 잔소리는 덤으로. 코즈메가 선물 꾸러미를 뒤적이는 사이 제 가방에서 작은 쪽지와 펜을 집어 든 쿠로오는 손바닥만 한 쪽지에 한가득 무언가를 줄줄 써 내려갔다. 뒤늦게 애플파이 한 조각을 꺼내 든 코즈메가 분주한 쿠로오의 모습에 뭐해. 라며 쿠로오를 빤히 쳐다보자, 이내 펜을 멈춘 쿠로오는 미리 준비한 작은 포스트잇을 쪽지 위에 붙이고선 코즈메에게 내밀었다.
노트는 후쿠나가한테 필기 부탁했어.
이제 장마래. 그래서 그런지 학교 앞에서 고양이들이 잘 안 보이더라.
너 계속 퇴원시켜달라고 했다며. 이마 상처 다 낫기 전까지만 그냥 있어. 아주머니 속상해하실걸.
오늘 하루 종일 뭐 했어?
“쿠로는 글씨도 시끄러워.”
처음 보는 말이 고작 이겁니까? 서운해, 켄마. 코즈메의 핀잔에 얼빠진 표정을 지은 쿠로오가 내밀어둔 종이 위로 제 심정과 비슷한 우는 얼굴을 끄적였다. 어떻게 그림도 저렇게 못 그리지. 침대 위라서 그런 건지 쿠로오의 몹쓸 그림실력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꽤 바삐 움직이는 펜이 제대로 된 직선 하나조차 그리지 못하고 신명 나게 찌그러지는 것에 코즈메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종이 위로 웃어?ㅡ ㅡ 라는 쿠로오의 불평이 새겨졌으나, 그마저도 볼품없는 글씨체로 쓰인 게(물론 반듯한 글씨체라도 다를건 없었을거다) 코즈메에겐 마냥 우스울 뿐이었다. 비웃음에 대해 쿠로오가 제법 따가운 시선으로 코즈메를 노려봤으나 코즈메는 아주 가뿐히 쿠로오를 무시한 채 제 손에 들려진 애플파이를 크게 물었다. 입안에 가득 차는 달달함이 익숙했다. 학교 앞 사거리 베이커리 거네. 이 군것질 귀신 같으니라고. 역시 이어지는 건 쿠로오의 잔소리였다.
“근데 저건 뭐야.”
“아, 맞다.”
코즈메가 쿠로오의 가방 옆에 놓여진 비닐봉지를 가리켰다. 그제야 잊고 있던 것이 생각만 듯 혼잣말을 뱉은 쿠로오가 봉지를 끌어와 작은 화병과 꽃다발을 꺼냈다.
“뭔 꽃이야.”
아주머니가 네 병실 칙칙하대서.
“근데 왜 꽃이야.”
예쁘잖아.
능글맞은 눈빛으로 푸른색 꽃을 내미는 쿠로오에 코즈메가 볼썽사납다는 듯 표정을 구겼다. 졸업식 때도 꽃다발은 안 받았는데. 코즈메가 멍하니 꽃다발을 바라보는 사이 (정확히는 노려보고 있었다) 화병을 씻어온 쿠로오가 꽃을 옮겨 담은 뒤 기똥차게 물까지 졸졸 채워주곤 협탁 위에 조심히 내려놓았다.
나름 괜찮지 않아?
"무슨 꽃인데."
중요해?
"글쎄."
당신을 평생 행복하게 해줄게요.
꽃말. 이게 제일 예쁘더라고.
"별걸 다 한다. 정말."
물론 나보단 못하지만.
쿠로, 가서 검진 받고 와. 머리를 부딪힌 건 분명 저였건만 다친 건 쿠로임이 틀림없다고 코즈메는 생각했다.
05.
쿠로오가 말했던 대로, 코즈메는 이마의 상처가 아묾과 동시에 퇴원했다. 물론 부모님은 그래도 좀 더 있는 게 낫지 않을까. 라며 코즈메를 달래려 했으나 학교에 가고 싶다는 말과 함께 짐을 정리하는 코즈메를 딱히 막을 도리가 없었다. 병원복을 갈아입은 코즈메가 가방을 열고 노트를 챙겼다. 아무것도 없던 병실은 거의 매일을 들낙거린 쿠로오와 가끔씩 안부인사 겸 찾아온 몇몇 배구부원들의 흔적들로 인해 그 새 생각보다 많이 어수선해져 있었다. ...야마모토가 주고 간 음료수는 언제 다 먹지. 저번에 쿠로가 사준 애플파이도 아직 두 세트나 남았는데. 작디작은 병원용 냉장고에 용케도 꾸역꾸역 차있는 주전부리들을 본 코즈메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구박을 해댔으면서 결국엔 다 지 거잖아. 입을 삐죽이며 쿠로오를 씹은 코즈메가 냉장고를 거의 털다시피 뒤적이기 시작했다.
냉장고를 완전히 정리하고 난 뒤에야 그 앞에 잔뜩 붙여진 쪽지들이 코즈메의 눈에 들어왔다. 물론 이젠 보는 것에 의존해야하니 뭐든 쓰여진 것이 많은 건 당연한 일이었으나 쪽지에 쓰여진 내용이라곤 기껏해야 코즈메의 어머니가 남긴 밥 챙겨 먹으라는 잔소리나 쿠로오의 장난섞인 포스트잇이 대부분이었다. 이래서 오늘 안에 병실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 아니면 혹시 내 병실이 다이어리였다던가 그런 건가. 냉장고를 뒤덮은 쪽지들을 하나하나 뜯어낸 코즈메가 가지고 있기엔 쓸모없고 버리기엔 뭐한 처치곤란의 종이 뭉텅이를 들곤 잠시 고민하다, 가방에 고이 쑤셔넣은 뒤 장정 한시간 반 동안 굽히고 있던 허리를 쭉 펴고 정말 문 앞을 향해 발을 뻗었다.
"아."
그리곤 제 앞에 놓여진 싱그러운 화병에 미간을 구겼다.
"행복은 무슨."
06.
퇴원한 다음 날 부터 코즈메는 학교에 나갔다. 부활동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경기는 무리였지만. 쿠로오는 생각보다 놀란 눈치였다. 솔직히 몸 핑계로 며칠은 쉴 줄 알았어. 날 대체 뭐로 보는거야. 부실에서 교복을 갈아입고 나온 코즈메가 쿠로오에게 작게 쏘아붙인 뒤, 체육관을 몇번 둘러보더니 느릿한 걸음으로 벤치를 향했다. 뒤에 서 있던 쿠로오는 그런 코즈메의 머리를 부드럽게 헝클인 뒤 코즈메를 등져 코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코즈메는 코트에 올라가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네코마'는 원체 '네코마'인지라, '뇌'의 부재에도 한결같이 공을 잇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 새 새로운 토스에 적응하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코즈메가 나른한 눈빛으로 네트를 주시했다. 공이 부딪힐 때 마다 손끝이 저릿저릿했다.
10분 휴식! 박수를 치기 무섭게 벤치로 달려오는 부원들에게 코즈메가 드링크 통을 건넸다. 다들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 각자 손가락을 들어올려 고맙다는 사인을 취했다.무심코 감사합니다, 켄마ㅅ.. 까지 쩌렁쩌렁하게 소리친 리에프도 코즈메와 눈을 마주친 순간 아차, 하며 멋쩍게 웃곤 브이를 들어 보였다.(사실 코즈메도 입모양으로 대충 알아 들었다.) 노트라도 놔둬야겠네. 타올로 땀을 닦아내던 카이가 코즈메의 어깨를 두드리며 싱긋 웃었다. 모두가 아무렇지 않은 척 하기에 급급했다. 역시 아직은 전부 익숙해지지 않은 모양이네. 코즈메는 애써 모른 척 해 주기로 했다.
경기 내내 코즈메는 삑삑대던 체육관의 발 굴리는 소리와 이리저리 튀어나가는 공의 파열음, 공을 쫒는 부원들의 목소리가 배제된 세상에서 묵묵히 제 자리를 지켰다. 막상 경기 도중에는 몰랐던 코트의 여러 구성들을 훑으며, 중간중간 블로킹이 성공했을 때나 슈퍼 리시브(쇼요의 말을 빌리자면)가 올라갔을때 나지막히 나이스를 외쳐주는 것 역시 하나도 빼먹지 않은 채로.
코즈메는 여전히 배구를 하고 있었다. 아주 분명하게. 달아오르지 않는 가슴과 차오르지 않는 숨이 이상할 만큼. 코트 너머에서 또다시 도약이 울렸다. 공이 제 옆을 스쳐 코트 구석에 처박혔다. 제 손끝을 스쳐가는 후끈한 열기에 코즈메가 주먹을 세게 말아쥐었다. 고요함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제 눈 앞에 빼곡하게 들어찬 풍경은 아주 빠르고 격렬했다. 다친 곳은 없었으나 어딘가가 아릿하게 쑤셨다. 빼앗긴 기분이었다.
"아깝다."
아무도 듣지 못할 목소리로 코즈메가 속삭였다.
07.
네코마는 봄고에서 카라스노에게 졌다. 비록 경기는 패배했으나 누구 하나 동요하지 않았다. 되려 후련한 표정이었다. 쓰레기장의 결전. 어쩌면 두 세대동안 고대했을 순간의 결말이었다. 두 감독이 어느때보다 굳건하게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두 주장은 서로의 등을 두드리며 목울대까지 차오른 울음을 가까스로 참아 냈다. 수고하셨습니다! 마주본 서로에게 전하는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정확히 그 중간에 서 있던 코즈메만이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채 눈치를 살펴 고개를 숙였다.
수고했어 켄마 -쇼요
역시 네코마는 강해 -쇼요
코즈메의 휴대폰 액정 위로 히나타가 보낸 라인 메세지가 반짝였다.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서 팔을 흔들며 엄지를 치켜드는 히나타에 코즈메가 바람 빠지게 웃었다. 재밌었어 오늘. 답장을 보낸 코즈메 역시 머리 위로 손을 들어 흔들었다. 아마 쇼요랑 경기를 했으면 더 재밌었겠지. 쫑긋대는 주황색의 뒤통수를 보며 코즈메가 눈을 감았다. 경기의 여파가 작은 손바닥 안에 가득 웅웅거렸다. 쇼요도 강해졌네. 코즈메는 어떤 순간보다 경기에 녹아 들어 있었다. 네코마의 뇌이자 척추로써, 카라스노를 가둔 새장을 헤집듯 분석해 제 동료들에게 조언을 남겼다. '한번 더' 가 없는 싸움. 코즈메는 헌신적이었다. 다만 누구보다 그 주역이 되어야 할 저의 자리가 코트 위가 아니라는 것에 못내 씁쓸해했다. 그뿐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쿠로
"아, 쿠로."
모이래. 가자. -쿠로
"응."
밥 뭐 먹을래. 맛있는 거 먹자. -쿠로
"아무거나."
휴대폰을 쥐고서 한참동안 눈을 감고있는 코즈메를 본 쿠로오가 코즈메를 툭툭 건드려 깨우곤 휴대폰을 가리켰다. 수고했어. 유독 그 네 글자가 코즈메의 가슴에 쿡쿡 박혔다. 배구를 너무나도 좋아하는 제 소꿉친구가 지금 어떤 심정일 지는 저는 감히 가늠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을 거라고 코즈메는 생각했다. 삼학년의, 쿠로의 졸업 경기였다. 그리고 끝이 났다. 허무하지 않아서 허무한 시합이었다.
더이상 쿠로오는 코즈메의 토스를 칠 수 없다.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있을 둘이었다. 제법 어렸을 때 부터 호흡을 맞춰왔기 때문이었을까, 그간의 오랜 시간들이 못내 아까웠다. 코즈메가 고개를 올려 쿠로오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땀에 흠뻑 젖은, 뭔가 아쉬운듯한 얼굴. 그럼에도 후회는 없는. 마지막 경기에 아주 잘 어울리는 표정이라고 생각했다. 쿠로도. 코즈메 역시 같은 말로 답했다. 그리곤 웃었다.
"재미있었어."
"?"
"나한테 배구 가르쳐줘서 고마워, 쿠로 "
"아 그래 ...뭐?"
아. 바보같은 얼굴. 코즈메가 멍한 얼굴로 저를 쳐다보는 쿠로오를 뒤로하고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경기장은 뜨거웠다.
08.
봄고가 끝난 이후부터는 속전속결로 시간이 흘렀다. 쿠로오는 졸업했고, 코즈메는 3학년이 되었다. 학년이 올라가며 동아리를 옮길까 생각도 했으나 부원들과 쿠로오의 완강한 반대와 사실 본인 역시 정든 부원들과 헤어지고 싶지 않았음에, 남은 일 년은 매니저로써 배구부에 남기로 했다. 새 주장은 야마모토였다. 은퇴식 때 야마모토는 쿠로오가 건네주는 1번 유니폼을 받고선 세상이 떠나가라 울었다. 끝까지 우렁차네. 그만 울어, 임마. 헤실헤실 웃으며 어깨동무를 한 쿠로오가 야마모토를 달랬으나 으, 흑, 네, 끄흐, 네. 한번 터져나온 눈물은 그칠줄을 모르고 질질 쏟아지는 게 울음소리 하나 듣지 못했던 코즈메가 괜찮냐며 등을 두드려줄 정도였으니 굳이 덧붙일 필요도 없었다.
에이스는 그토록 원했던 리에프가 가져갔다. 졸업하기 전까지 네 엉터리 리시브를 다 뜯어고쳐 놓겠다는 야쿠 선배의 노력이 빛을 발한건지, 수비에 제법 자세가 갖춰진 리에프는 타고난 피지컬과 센스로 하루가 멀다고 성장했다. 코즈메의 생각에 따르면 인정하긴 싫지만 제법 블로킹도 그럴듯해졌다고. 최근엔 점프 서브를 연습한다며 무작정 공을 치기 시작했는데, 때리는 족족 아웃이라 야마모토에게 할거면 제대로 하라는 욕을 얻어먹는다고 했다. 아마 정신상태는 여전한 모양이었지만.
그리고, 코즈메는 여전히 그런 네코마의 심장이었다.
09.
코즈메가 졸업하는 날은 쿠로오의 눈물샘이 마르는 날이었다. 우는 모습 한번 텄다고 이젠 상관없단 건지 이날만을 위해 그동안눈물을 참아온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작 본인조차 한방울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을 저가 대신 쏟아내며 오열하는 쿠로오를 보면서 코즈메는 그냥 이 상태로 모른 척 하고 도망갈까 심각하게 고민할 정도였다고.
코즈메의 졸업식에는 중학교와 같이 여전히 꽃다발이 없었다. 워낙에 꽃과는 거리가 먼 성격임을 아는 주변인들이 굳이 꽃보다는더 물질적인 게 낫지 않을까 하며 선물을 준비한 덕분에 일어난 일이었다. 고등학교 졸업식 쯤이면 형식상 하나쯤은 있어도 될 법하건만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물론 코즈메는 신경쓰지 않았다. 되려 이쪽을 더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양 손에 바리바리 쥐어지는 쇼핑백들을 한 손으로 모아 들은 코즈메가 우는 쿠로오에게 팩 휴지를 건넸다. 쿠로도 참 주책이야. 저정도면 병이 아닐까 싶을 만큼.
사진 찍으러 가자. 꽃 어딨어 -쿠로
뭔 꽃 -켄마
졸업식이잖아. 꽃다발. -쿠로
없는데? -켄마
어????? -쿠로
빨개진 얼굴로 액정을 두드리던 쿠로오가 코즈메의 대답에 고개를 들고 의아하다는 듯 코즈메를 빤히 쳐다봤다. 뭘 봐. 꽃다발없어. 안 받았어. 확인 사살이라도 시키는 마냥 따닥따닥 들려오는 코즈메의 대답에 쿠로오가 얼빠진 표정을 짓다, 금방이라도 꽃집을 털어낼 것 처럼 성큼성큼 발을 옮겼다. 또 뭔 짓을 하려고. 가지마. 고개를 저으며 제 옷자락을 꽉 잡은 코즈메에 쿠로오가 영 못마땅하다는 듯 코즈메의 작은 손을 노려봤다. 난 꽃 안받아도 돼. 별로야. 온갖 모양으로 찌그러지는 쿠로오의 입모양이 별안간 꽤 할말이 많은 듯 했다.
아무리 그래도 졸업식이잖아 -쿠로
이 앞에 빨리 가서 사올게 -쿠로
다 하나씩 갖고 있는거면 무슨 상관이야.-켄마
켄마. 당연한게 제일 좋은거야. -쿠로
아니 다들 왜 꽃을 안 사왔대 -쿠로
쿠로도 안 사왔잖아 -켄마
아니 나는 누구 한명 쯤은 사 올 줄 알고 -쿠로
다 그래. 굳이 안 받아도 돼 -켄마
꽃 없는 졸업식이라니. 팥 없는 찐빵도 아니고 이게 뭐야. 새빨개진 얼굴로 꽃 하나에 열심히 열변을 토하는 쿠로오를 코즈메가 됐다니까. 집 가자. 라며 단번에 잘라냈다. 꽃 대신 이거나 들어. 제 손에 가득 들린 짐을 쿠로에게 떠넘긴 코즈메가 앞서 걸었다. 어느새 제 손에 가득 들려진 짐을 덥썩 쥐어든 쿠로오가 코즈메의 뒤통수에 따가운 시선을 꽂아대며 뒤를 따랐다.
띠링.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게요. -켄마
그게 제일 예쁘다며. -켄마
... 갈수록 뻔뻔함이 늘어. 쿠로오가 제 휴대폰 액정에 띄워진 두 문장에 애써 입꼬리를 비틀며 웃음을 참았다. 뒤돌아선 코즈메가 개구지게 웃었다.
10.
쿠로 오늘 퇴근 몇 시야. -켄마
나 오늘 야근인데. 9시? -쿠로
바쁘네. 화이팅. -켄마
나 좀 꺼내줘 -쿠로
타자 너머로 아른거리는 앓는 쿠로오의 모습에 코즈메가 사악한 미소를 띈 채 액정을 두드렸다. 열심히 해. 돈 벌려면 바쁘게 살아야지. 자판에서 보이는 단호함과 동시에 나타나는 여유로움에 문자를 받아본 쿠로오는 입술을 꾹 깨물곤 제 서류들을 챙겨들었다. 입사하고 일 년 내내 바빴는데 어떻게 뭐든 줄지가 않냐. 자판기에서 인스턴트 커피 두 잔을 뽑아마신 쿠로오가 좀비같은 몰골로 사무실 선반을 노려봤다. 아무것도 하기 싫다. 야근하는 모든 직장인의 한을 읊으며 무거운 눈꺼풀을 애써 들어올린 쿠로오가 때마침 빛나는 제 휴대폰을 빤히 바라봤다.
끝나면 데리러 갈게 -켄마
아. 역시 사람은 일을 해야지. 누구 행복하게 하려면. 쿠로오가 제 약지에 깨워진 반지를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바보같은 웃음이 났다. 행복이 달았다.
#후기
안녕하세요 대지각러 슬기입니다................ 우선 합작을 주최해주신 시바님께 정말 죄송하다는 말과 감사하다는 말씀 드리고 싶네요............ㅜ 분명을 시험을 끝내고 합작을 신청했는데 정신차려보니 시험기간이었고 시험을 끝내니 마감일까지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아있던 터라 원래 잡았던 플롯을 싸그리 갈아엎고 새 글을 써 버린 덕분에^^! 주제가 뭔지 꽃말은 왜 들어간건지 저는 뭘 쓴건지 모르겠는 아주 복합적인 쓰레기가 나와서 너무 슬픕니다......... 개연성을 밥말아먹어서 일부러 시점 분할까지 했는데도... 그래도............(말잇못) 차마 저는 읽지 않으려고요..............(눈물세바가지) 퇴고는 없었다.... 김슬기 너 진짜 다시는... 합작마감한다고 설치지 마라...ㅎㅎ 전체 내용보다는 만약 켄마의 귀가 들리지 않는다면 둘의 일상은 어떻게 변했을까? 에 집중하고.... 예능처럼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중요 소재들을 다 빼먹어버린 터라 뭐가 로맨스인지 뭐시 중헌건지 저도 모르겠거든요^0^ 사랑합니다 여러분 ㅎㅎ
다시금 너무너무 좋은 합작 열어주신 시바님께 무한 감사와 사랑과 죄송함을 전하며 이만 말 줄이겠습니다 쿠로켄 사랑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