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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향- 꿈속의 사랑

by. 에이(@HQ_AtoZ)

 

그 아이를 처음 본 것은 강의실에서, 였다.

 

 

 

사고를 당하고 난 뒤, 재활치료네 뭐네 하면서 오랜 휴학 끝에 돌아온 학교였다.

 

동기들은 이미 졸업한 지 오래였고, 지금 남아있는 후배들도 얼굴이 가물가물한 상태였다.

 

 

 

저기 맨 뒷자리에 앉아있는 쿠로오 테츠로는 크게 하품을 했다.

 

원체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했던 쿠로오는 이런 어색한 분위기가 달갑지 않았다.

 

그렇다고 자신을 힐끔거리며 수군거리는 저 후배들과 친해지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한 학기만 마치면 졸업이니까.

 

 

 

쿠로오는 책상 위로 늘어졌다.

 

 

 

아아, 지루하다.

빨리 졸업했으면.

 

 

 

-

 

 

 

그렇게 무심하게 엎드려 있다가 교수가 들어오는 소리에 쿠로오는 나른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수업은 들어야지, 싶어 책을 꺼내려는데.

 

 

 

쿠로오는 갑자기 드는 알 수 없는 느낌에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그 때였다.

 

 

 

아까는 자리에 없었던 그 사람이 나타난 것은.

 

 

 

-

 

 

 

처음엔 잘못 본거라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선이 흐릿해 보이는 탓이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은 잠시라도 눈을 떼면 사라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선이 흐릿함에도 불구하고, 쿠로오의 눈에 그만큼 선명하게 보이는 것은 없었다.

 

그렇게 몇 분을 멍하니 그 사람을 바라보았을까.

 

 

 

그 사람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얄쌍한 얼굴에 빛나는 금안과 마주쳤을 때, 쿠로오는 민망함을 느끼며 고개를 돌리려 했다.

 

 

 

하지만,

 

 

 

'안녕'

 

 

 

희미한 미소와 함께 입모양으로 인사를 건네는 그 얼굴에 쿠로오는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

 

 

 

넋이 나간 채로 강의 시간이 흘러갔다.

 

 

 

교수가 두꺼운 책을 탁- 덮으며 강의 종료를 알렸을 때야 비로소 쿠로오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앉아있던 그 자리를 보았을 때는,

 

 

 

그 사람은 벌써 사라지고 없었다.

 

 

 

메일 주소라도 물어볼걸, 아님 이름이라도.

 

 

 

쿠로오는 넋 나가 있던 자신을 탓하면서 머리를 긁적이고는 강의실 밖으로 나갔다.

 

 

 

-

 

 

 

다음 날.

 

 

 

쿠로오는 누구보다 더 빨리 강의실에 도착했다.

 

어제와는 다른 수업이긴 하지만, 이 수업도 혹시 듣지 않을까 싶어서.

 

어제 학교 한 바퀴를 주욱 돌며 그 사람을 찾아다녔지만, 결국 찾는 데는 실패한 기억이 있는 쿠로오였다.

 

 

 

그 얼굴을 다시 한 번 보고 싶었다.

 

'안녕'이라고 움직이던 그 입모양도 보고 싶었고, 그 목소리도 한 번 들어보고 싶었다.

 

 

 

쿠로오 본인도 왜 이렇게 그 사람에게 집착하는 지 알 길이 없었다.

 

그냥 다만 오늘은 꼭 그 사람의 이름을 알아내야겠다고 다짐할 뿐이었다.

 

 

 

그리고 오늘도,

 

 

 

'안녕, 쿠로오.'

 

 

 

쿠로오는 그 사람을 보았다.

 

 

 

-

 

 

 

오늘도 다른 사람에 비해 흐릿해 보이는 그 사람의 형태에 쿠로오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았다.

 

이렇게 보면 조금 더 선명하게, 더 진하게 보이지 않을까 해서.

 

 

 

사실 쿠로오의 눈에는 충분히 그 사람이 선명하게 각인되었기에, 이건 그냥 더 선명하게 보고 싶은 쿠로오의 욕심이었다.

 

 

 

그렇게 뚫어져라 바라보았건만,

 

강의가 끝나고, 시린 눈을 비비고 나니 또 사라져 버렸다.

 

 

 

쿠로오는 우르르- 강의실을 빠져나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 사람이 있던 자리를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

 

 

 

다음 날, 쿠로오는 그 사람이 늘 앉는 자리의 책상에 쪽지를 하나 두었다.

 

 

 

너무나도 묻고 싶었던 한 마디.

 

간절한 그 한마디를 꾹꾹 적어 쪽지로 남겼다.

 

 

 

오늘도 그 사람은 나타났다.

 

책상 위에 놓인 쪽지를 의아하다는 듯 보다가 펼쳐보더니, 뒤를 돌아서는 쿠로오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오늘도 입을 열어 안녕- 을,

 

 

 

아니, 오늘은 조금 다른 말이었다.

 

 

 

'코즈메, 켄마'

 

 

 

쿠로오는 그 사람의 입모양을 보고 시익- 웃었다.

 

 

 

"코즈메, 켄마."

 

 

 

조심스럽게 입 안에서 그 말을 굴려보았다.

 

 

 

그게 네 이름이구나.

 

.

 

.

 

[이름이 뭐야?]

 

.

 

.

 

 

 

-

 

 

 

그렇게 쿠로오는 쪽지로 켄마와 대화하기 시작했다.

 

 

 

쿠로오는 늘 조금 더 일찍 와서 쪽지를 책상에 두고 갔고, 켄마는 그 쪽지를 펼쳐 입모양으로 대답해주곤 했다.

 

 

 

[몇 살이야?]

 

 

 

'한 살, 어려'

 

 

 

[켄마- 라고 부를게.]

 

 

 

'응, 쿠로'

 

 

 

[디저트 좋아해?]

 

 

 

'애플파이, 좋아해'

 

 

 

[나 애플파이 만들 줄 아는데.]

 

 

 

'그렇구나'

 

 

 

.

 

.

 

.

 

 

 

그렇게 쪽지로 대화를 한 지 일주일 즈음 지났을까.

 

쿠로오는 오늘도 켄마의 책상 위에 쪽지를 놓기 위해 일찍 강의실에 들어섰다.

 

 

 

그런데, 오늘은 다른 날과 달랐다.

 

늘 수업 직전에 나타나던 켄마가 쿠로오보다 더 먼저 강의실에 나타나 있었다.

 

 

 

쿠로오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켄마, 안녕."

 

 

 

사실, 이렇게 만나게 되면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쿠로오는 고민했었다.

 

그러나 막상 만나게 되니, 이런 진부한 인사뿐이더라.

 

 

 

그렇게 쿠로오는 처음으로 켄마에게 쪽지가 아닌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이런, 목소리가 떨리잖아.

 

 

 

크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런 쿠로오의 모습에 켄마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쿠로, 안녕."

 

 

 

처음 듣는 켄마의 목소리.

 

 

 

늘 입모양으로만 대답해주었기에 어떤 목소리일까, 많은 상상을 했었는데.

 

조금은 나른해 보이는 목소리에 쿠로오는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은 기분이었다.

 

 

 

"오, 늘은 일찍 왔네."

 

 

 

목소리를 다시 가다듬고는 쿠로오가 말을 걸었다.

 

켄마는 그런 쿠로오의 팔을 살짝 잡았다.

 

 

 

"쿠로, 애플파이 만들 줄 안다고 했지."

 

 

 

형태만큼이나 흐릿한 켄마의 감촉에 쿠로오가 숨이 멎을 듯 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그럼, 만들어줘."

 

 

 

언제, 어디에서- 라고 물어보려던 쿠로오의 마음을 읽었는지 켄마는 다시금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지금, 우리집에서."

 

 

 

-

 

 

 

수업은 중요하지 않았다.

 

졸업을 한 학기 앞둔 쿠로오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쿠로오는 양 손 가득 재료를 사들고는 켄마의 뒤를 따라가는 중이었다.

 

 

 

켄마의 집에 가까워질수록 흐릿하던 켄마는 조금씩 더 선명해졌다.

 

오히려 주변 사람들이 흐릿해 보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쿠로오의 눈에는 켄마를 처음 본 순간부터 그 흐릿해 보이던 켄마 외의 다른 사람들이 더 흐릿하게 보였으니, 크게 이상하다고 느낄 것도 없었다.

 

이제 눈을 가늘게 뜨고 힘주어서 보지 않아도 선명하게 보이는 켄마에 쿠로오는 마음 편히 켄마를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이 좋을 뿐.

 

 

 

그렇게 켄마를 따라갔을까.

 

 

 

어디선가 향기로운 꽃내음이 나는 듯 했다.

 

그리고 고즈넉한 풍경과 잘 어울리는 집 앞에서 켄마는 멈춰섰다.

 

 

 

"여기야, 우리 집."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에 풍경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마당 한가득 심어져 있는 하얀 꽃이 향기로운 꽃내음의 정체인가, 싶었다.

 

 

 

"천리향이야. 먼발치에서도 향기가 난다고 해서 천리향이라고 불려."

 

 

 

하얀 꽃 옆에 하얀 미소를 지으며 설명해주는 켄마에 쿠로오는 홀린 듯 켄마를 바라보았다.

 

천리향의 향보다, 켄마의 저 미소에서 더 진한 향이 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

 

 

 

쿠로오는 열심히 애플파이를 만들었다.

 

 

 

사실 쿠로오는 베이킹과는 전혀 무관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뭔가 잘 되는 느낌이었다.

 

마치 경력 1n년차 제빵사 마냥 능숙하게 해내는 중이었다.

 

 

 

오븐에 파이지를 넣고 굽고, 중간중간 쉴 때마다 제 뒤에서 게임기를 손에 들고 뿅뿅- 게임하는 켄마를 슬쩍 보는 재미도 좋았다.

 

 

 

슬슬 달콤한 애플파이 향이 퍼지자, 켄마는 손에 든 게임기를 내려놓았다.

 

 

 

"다 됐어?"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애플파이를 내려놓는 쿠로오의 얼굴은 뿌듯함으로 가득 찼다.

 

조심스럽게 포크로 잘라 입에 가져간 켄마는 오물거리다 다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맛있네, 쿠로."

 

 

 

작은 목소리로 쿠로오의 애플파이를 칭찬하는 켄마에 쿠로오는 괜히 행복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 정도쯤이야, 매일 만들어 줄 수 있지."

 

 

 

괜스레 어깨에 힘이 들어간 쿠로오의 말에 포크를 움직이던 켄마가 고개를 들었다.

 

 

 

"매일, 해 줄 수 있어?"

 

 

 

"그럼. 네가 원한다면."

 

 

 

자신감에 차오른 쿠로오의 목소리에 켄마는 조금 더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매일 여기서, 애플파이를 만들어줘. 이 집에서 말이야."

 

"어디가지 말고."

 

"내 옆에서."

 

"평생."

 

 

 

처음 보는 켄마의 환한 미소에 홀린 듯 쿠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평생 그렇게 해줄게."

 

 

 

어디선가 맡아지는 천리향 꽃내음에 쿠로오는 취할 것만 같았다.

 

 

 

그렇게 쿠로오는,

 

 

 

평생,

 

 

 

켄마의 곁에 있게 되었다.

 

 

 

-

 

 

 

Epilogue.

 

 

 

삑, 삑,

 

 

 

규칙적인 기계음만이 가득한 병실 문을 열고 간호사가 들어왔다.

 

부산스럽게 환자의 기본 상태를 체크하는 간호사는 미처 보지 못한 모양이다.

 

 

 

오랜 시간동안 의식이 없던 환자, 쿠로오 테츠로의 얼굴 가득 만연한 미소를.

 

 

 

 

 

[요즘 '천리향 괴담'에 대한 이야기로 떠들석한데요, 꿈 속에 '천리향' 내음을 풍기며 사람을 홀려서 무의식으로 빠지게 만든다는 괴담입니다. 이 괴담은 어느 소설에서 비롯된 것으로...]

 

 

 

병실 문 너머로 들려오는 텔레비전 와이드쇼 소리가 고요한 병실을 채워주고 있었다.

 

 

 

쿠로오 테츠로 X 코즈메 켄마

 

- From_AtoZ

 

 

 

[해설]

 

 

 

'천리향'의 꽃말은 '꿈 속의 사랑' 입니다. 말 그대로 이 모든 스토리는 쿠로오의 꿈 속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곳곳에 개연성이 떨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꿈 속의 세상이란 개연성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지요. 말도 안되는, 이해 안되는 상황이 '자연스럽다'고 여기는 부분은 꿈 속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모순적인 부분이 많았죠. 남들과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는 쿠로오가 후배들과 친하게 지내지 않는 부분도, 켄마에게 다가가서 얘기를 나누면 될 것을 굳이 꼭 쪽지로, 그것도 별 영양가 없는 질문을 던지는 것도요. 게다가 켄마는 쿠로오의 이름과 나이를 알고 있었는데 자각하지 못한 것도. 이 모든게 '꿈 속' 이라는 장치 때문입니다.

 

 

 

마지막 텔레비전 와이드 쇼에서 나온 '천리향 괴담'의 주인공이 바로 켄마 입니다.

 

꿈 속에서 천리향이라는 향으로 사람을 홀려, 계속 무의식에 빠지게 만들죠.

 

그런 켄마의 목표가 쿠로오였고, 결국 쿠로오는 평생 무의식에 빠져 살게 됩니다.

 

 

 

표현하고 싶은 게 많았는데 글솜씨가 부족하여 기나긴 해설까지 덧붙이게 되었네요.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후기

제게 있어 쿠로켄은 켄마가 애플파이를 좋아하는 것만큼이나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라 한 번쯤 합작 열리지 않을까 싶었는데, 마침 이렇게 좋은 주제로 합작이 열려서 조심스럽게 손가락 하나 얹어 보았네요!

하지만 현생에 많이 지쳐서 이 예쁜 아이들로 좋은 이야기를 풀지 못했다는 것이 제일 아쉬운 점으로 남습니다. 다음엔 더 좋은 끄적거림으로 다시 한 번 쿠로오와 켄마의 이야기를 쓰고 싶습니다!

여러분 모두 대메이저 쿠로켄 하세요! :D

 © 2020.08.19 Kuroken Flower Collaboration with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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