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사블랑카- 당신을 진정 사랑하기에 떠나보내겠습니다
by. 흑막(@xmo_ll)
눈이 내리는 하얀 겨울. 입술 새로 하얀 숨이 빠져나왔다. 한 손에는 캐리어를, 또 한 손에는 무거운 가방을 든 채로 내 10대를 보낸 집을 바라보았다. 복잡한 생각들 중에서도 단 하나의 다짐. 얼른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한시라도 멈춰있을 수 없었기에, 더 이상의 미련은 버려버리고 발걸음을 옮겼다.
나의 스무 살. 시작은 그와의 이별로 10대를 끝맺음 지으려 한다.
카사블랑카
내가 기억하는 아주 오래되고 빛바랜 기억은, 나의 어머니가 하얀 약을 입안에 털어놓고 흐느껴 울던 모습이었다. 긴 머리카락과 창백한 피부. 번진 화장이 조금 무섭게 느껴졌던 것 같다. 그 기억을 기반으로 3개월 후, 어머니는 직접 자신의 손으로 생을 마감했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혼자 남겨진 후 두려움을 느낀 것도 아니었다. 어머니는 내게 그 무엇도 알려주지 않았기에. 풍부한 지식과 새로운 감정들,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또는 어떻게 살아가야 될지도 알려주지 않고 가버린 이기적인 어머니. 그렇기에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저 그랬다. 어머니의 죽음과 동시에 시작된 어머니의 장례식은 외갓집의 도움으로 치룰 수는 있었다. 많지 않은 사람들이 다녀갈 동안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이 지루한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길 간절하게 바랐다.
마지막 날, 검은 정장에 큰 키를 가진 그를 만났다. 뻗친 머리와 눈물을 머금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 눈이 마주쳐 급하게 시선을 내렸다. 뒷짐을 지고 발가락을 꼬물거리고 있자 어느새 제 앞으로 드리워진 그림자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툭 치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나와 시야를 맞추며 애써 웃어 보이던 그. 그의 눈을 바라보다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네가 켄마지? 코즈메 켄마.”
내게 아는 척하던 사람들은 많았다. 네가 켄마구나. 불쌍한 것, 딱한 것. 그런 말을 할 줄 알았기에 티도 나지 않게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는 다른 이들과 다르게 자신의 이름을 먼저 밝힌 후 자신을 어머니의 친구라 설명했다. 쿠로오 테츠로, 그의 이름. 그는 내 손을 꼭 잡더니 갈 곳이 있냐 물었다. 갈 곳이라면, 장례식이 끝난 뒤 내가 돌아갈 수 있는 집을 말하는 것이리라. 잠시 생각을 했다. 삼촌 집에 가는 것은 싫었다. 눈칫밥을 먹으며 살고 싶진 않으니까. 엄마와 함께 지냈던 집으로 돌아가는 것조차 싫었다. 혼자 남겨진 후 몰아치는 후폭풍이 나를 괴롭힐 테니까. 짧은 생각을 마치고 고개를 젓자 그는 망설이는 듯하더니 내 눈치를 보며 말을 꺼냈다.
“너만 괜찮으면 나랑 함께 갈래?”
커다래진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왜냐고 묻기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그저 멍하니 쳐다만 보았다. 그가 횡설수설하며 말을 덧붙였으나 들리지 않았다. 왜 내게 그런 제안을 하는 것인지, 그때는 차마 알지 못했다. 그의 행동을 바라보다 천천히 입술을 뗐다.
“갈래요.”
그는 또다시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날 바라보더니 가볍게 안아 들고 장례식장을 빠져나갔다. 그의 품에 안기며 든 생각은, 장례식 도중 이렇게 나가도 되는 걸까. 어차피 삼촌이 하는 것이니 나는 빠져도 상관없지 않을까, 정도. 그 이상의 생각은 하지 않으려 했다. 머리가 복잡해지는 건 어렸던 그때도 너무나 힘들었으니. 그의 품에 안겨 가는 동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었다. 며칠 전, 처음 본 자신을 삼촌이라 소개하던 남자.
“당신, 누구야?”
삼촌은 그를 붙잡았고, 그는 난감한 표정을 지은 채 나를 더욱 꽉 껴안았다. 그 힘이 얼마나 세던지, 몸이 으스러지는 것만 같았다. 그때 마침 뒤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자신을 쿠로오 시로라고 소개하는 여자. 나를 안고 멍하니 서 있던 그는 여자의 손짓에 서둘러 이 상황을 벗어났다.
차에 나를 태우고 조수석에 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잠깐의 상황에 지친 것처럼 보였다. 할 일 없이 허공만 바라보고 있을 때, 재킷을 벗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여자가 보였다. 담배를 꺼내 물고 라이터로 불을 붙이는 그녀. 하얀 연기가 위로 올라가다 사라졌다. 다 타 버린 담배를 땅에 버리고 밟아 남은 불씨마저 꺼버린 후 운전석에 앉는 그녀는 그와 몇 마디를 나누더니 뒤를 돌아 나를 바라보았다. 싱긋 웃어보이는 그녀가 미소가 예쁘단 생각을 했다.
“안녕, 켄마. 시로라고 불러줘.”
시로. 나의 두 번째 구원자. 나는 그 순간을 내 행복한 기억 중 첫 번째로 뽑고 있다. 이 얘기를 시로에게 말할 때면 굳이? 라는 대답이 돌아오긴 하지만, 내게 성이 아닌 이름부터 알려준 건 시로가 처음이었으니. 그 당시에는 그만큼 행복한 게 없던 것 같기도 하다.
눈을 감고 뜨니 어느새 그의 집에 도착해 있었다. 깔끔한 방. 욕조가 딸린 화장실과 포근한 침대가 있는 그의 침실. 전에 살던 집을 생각하면 이곳은 부잣집 남부럽지 않았다. 내게는 거대한 성과도 같던 그의 집. 방 문턱 앞에서 기웃거리고 있자 그는 괜찮다며, 방안을 둘러봐도 좋다고 말했다. 그의 방으로 들어가 부엌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그를 바라보았다. 처음 느껴보는 그들의 다정함이 무서웠다. 나를 매정하게 떠나버린 엄마처럼, 그들도 나를 떠날지 모르겠다는 불안감 때문에 그 어린 나이에 잠을 설쳤던 적도 있었다.
머리가 크고 나서 그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랐음에도 나는 여전히 남들의 눈치를 보았다. 조그만 행동과 말투, 눈빛을 보며 그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굴었고 학교에 가서도 다를 건 없었다. 쉬는 시간에는 언제나 혼자서 게임을 했고 수업시간에는 졸지 않으려 노력했다. 조그만 행동도 선생님의 눈에 띄면 결국 모두의 시선을 받게 될테니. 그런 생활을 이어가던 도중 16살 때, 같은 반 불량한 무리들 눈에 들어가게 됐다. 매일 들고 다니던 내 게임기를 뺏고, 내 가방을 던지고 발로 차며 더럽히거나, 사물함에 썩은 우유를 넣고 책상에 칼로 그어 욕들을 써놓는 등 유치한 행동들을 일삼았다. 선생님에게 불려가 반성문을 쓰고 온 그들은 네가 일러바쳤지? 라며 내게 폭행을 가하기까지 했다. 하루는 그 일방적인 폭행들을 감당하지 못해 커터칼을 꾸욱 잡고 숨을 깊게 참았던 적도 있었다. 여전히 손목에 자리한 짧은 흉터들은 가끔씩 내 심장을 찔러온다. 나의 고통은 아직 존재하고 있다며 알리는 것처럼. 다른 날, 그들이 심하게 폭행을 가했던 적이 있었다. 얼굴과 다리, 팔에 퍼런 멍과 상처를 달고 집으로 돌아간 그 날. 쿠로는 여태 보여주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잔뜩 화가 난 그의 얼굴을 한 손으로 쓰다듬으며 피가 터진 입술로 오물거렸다.
“나 괜찮아, 쿠로.”
쿠로는 그런 내 손을 꽉 잡고 아프게 껴안았다. 뜨거운 온기와 들썩이는 머리. 쿠로에게 괜찮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르겠다. 괜찮아, 그 애들이 이상한 거야. 쿠로가 말했잖아, 나는 이상한 게 아니라고. 그러니 괜찮아.
다음 날, 나를 괴롭히던 아이들은 쉬는 시간마다 교무실로 불려갔고 그다음 날은 그들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 사건 이후의 생활은 평탄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 선배의 권유로 동아리 활동도 들었고 거기서 몇 명의 친구도 사귈 수 있었다. 귀찮고 말 많은 아이들이긴 하지만 쿠로와 함께 있을 때처럼 편했다. 그리고 사건이 터진 것도 아마 이맘때 쯤 이었던 것 같다. 학교 생활에 집중하던 생활들. 쿠로는 어느새 대학교를 졸업해 회사에 취직 했고, 시로는 언제나처럼 애플파이를 사 들고 나를 보러와 주었다. 그리고 나는 익숙하게 시로를 반겨주었고, 쿠로가 들고 있는 애플파이를 탐내며 늘 비슷한 나날들을 보내던, 10대의 끝자락. 많은 이들은 우리를 보며 가족이라 불렀다. 그래, 누가 봐도 이상할 것 없는 가족. 난 그들에게 서서히 스며들었음에도 가슴 한켠에 진 응어리는 차마 무시할 수 없었다. 그와 나의 관계를 가족이란 단어로 정의 내리기가 불편했다. 나는 그보다 더 큰, 무언가로 우리의 관계를 말하고 싶었기에. 시작의 발단은 꿈에서부터 시작했다.
나를 만지는 쿠로의 손. 그의 손은 점점 올라와 나의 뒷목을 받쳤고 이어 입술을 맞추었다. 저항은 하지 않았다. 할 수가 없었다. 그저 그가 만지면 만지는 대로,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의 손은 다시 밑으로 내려가 옷을 하나둘 헤쳐 풀었다. 완전히 나체가 된 나는 평소의 나답지 않게 그를 향해 팔을 벌렸고 그는 그런 나를 강렬하게 껴안았다. 다시 입을 맞추고 나의 몸을 탐하는 쿠로.
꿈에서 깼다. 몽정이다. 그를 향한 완전한 욕망이었다.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일어나 속옷을 빨고 느긋하게 옷을 챙겨입은 다음 아침을 차렸다. 아침이라기엔 너무나 소소한 식빵과 잼. 그리고 바나나. 식탁 의자에 앉아 천천히 씹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에 대한 감정이 없었다면 그저 꿈이라고 넘어갈 일이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아니, 애초에 가족을 대상으로 몽정을 꾸는 게 정상일까? 이젠 인정하기로 했다. 내게는 너무나도 생소한 이 감정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가 배를 긁으며 내게 짧은 아침 인사를 건넸다.
“웬일로 일찍 일어났네, 켄마.”
대답하지 않았다.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쿠로는 애초에 내 대답은 상관도 없었다는 듯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갔다. 이어 물 트는 소리가 들리고 모든 신경을 그곳에 집중했다. 몸에 물을 묻히고 세수를 하는 쿠로. 양치를 먼저 하고, 가글 하며 거품을 뱉어낸 후 샴푸로 머리를 감는 것까지. 화장실 너머 들려오는 소리로도 그가 하는 행동들을 모두 알 수 있었다. 그는 빠르게 씻고 머리를 털며 욕실에서 나왔다. 그가 나오자마자 눈을 빠르게 피하고 여전히 반쯤 남아있는 식빵을 한입에 베어 물었다.
“켄마. 오늘은 몇 시에 와?”
“몰라.”
“나 오늘 회식이라 조금 늦어. 저녁 알아서 챙겨 먹어야 돼.”
대답은 하지 않았다. 쿠로도 이젠 그러려니 하는 듯했다. 오랜만에 늦장을 부리고 천천히 집을 나왔다. 나오자마자 게임기를 킨 후 게임을 하면서 여전히 혼란스러운 생각들을 정리했다. 실은, 무엇이 혼란스러운지도 모르겠다. 그를 향한 내 감정인지, 아니면 내게 혼란을 안겨주는 그의 태도인지.
하교 후, 집에 오니 적막한 공기가 나를 반겼다.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침대에 누워 계속해서 게임을 했다. 쿠로가 오면 또 잔소리 하겠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서서히 잠든 것 같다.
다시 눈을 떴을 땐 깜깜한 저녁이었다. 급하게 일어나 핸드폰을 켜 시간을 확인한 후, 시로에게 문자를 보냈다. 저녁 먹었냐는 물음에 근사하게 먹었다는 시로의 대답. 그리고 여전히 조용한 집 안에 고개를 들었다. 회식이 있다고 했던가. 핸드폰으로 익숙한 전화번호를 친 후 통화버튼을 눌렀다. 긴 신호음에 끊으려던 찰나, 그가 전화를 받았다.
“쿠로, 언제 와?”
[아, 혹시 쿠로오씨 동생 분인가요?]
낯선 목소리. 불편한 감정이 솟구쳐 올라왔다. 어렵게 대답을 하자 들려오는 말에 서둘러 겉옷을 챙기고 밖을 나섰다.
[쿠로오씨가 많이 취해서요. 근처 모텔에서 재울 것 같은데, 쿠로오씨가 계속 동생 얘기를 하네요. 시간 괜찮으시면 데리러 오시겠어요?]
문자로 온 회식 장소. 버스 타고 1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지만 급하게 택시를 불렀다. 5분 이내로 도착한 곳. 시로가 쓰라고 준 카드로 계산을 한 후 주변을 살펴보았다. 저 멀리 정장을 입고 무리로 식당을 빠져나오는 사람들. 그들에게 다가가 쿠로를 찾았다.
“쿠로!”
그가 인사불성인 채로 동료 직원들에게 기대어 겨우 서 있는 모습을 보았다. 쿠로는 이름이 불리자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더니 밝게 웃으며 내게 팔을 벌렸다. 그 순간 넘어지려는 쿠로를 겨우 잡아 세우고 무거운 몸을 이끌어 그곳을 빠져나오려 했다. 사람이 많은 곳은 언제나 불편했으니까.
“저기요!”
누군가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나와 비슷한 키. 긴 머리에 마른 체형. 쿠로의 이상형과 비슷한 여자다.
“쿠로오씨 동생 분이시죠? 아까 전화 받은 사람이에요.”
“아, 네.”
“늦은 시간에 불러서 죄송해요. 혹시 괜찮으시면 차 태워드릴까요?”
“아, 아뇨. 택시 타면 돼요.”
여자를 지나쳐 택시를 잡으려 도로를 훑어보았다. 사람은 이리도 많은데 지나가는 택시 하나가 없다니.
“멀지 않은 것 같은데, 어차피 금방이니까 태워드릴게요. 늦은 시간에 부른 것도 죄송하고….”
의심쩍은 표정으로 여자를 바라보다 다시 한번 도로를 보았다. 여전히 택시는 보이지 않고, 걸어가면 20분에 쿠로와 함께 버스를 탈 체력은 없다.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여자의 차에 탑승하게 되었다.
조용한 차 내부. 자고있는 쿠로를 바라보다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자는 백미러로 나를 힐끗 바라보더니 이 조용한 적막을 깨버렸다.
“쿠로오씨랑 하나도 안 닮으셨네요.”
여자를 바라보았다. 알면서 일부러 저렇게 말하는 것일까?
“가족이 아니니까요.”
“쿠로오씨는 동생 분이라고 소개해 주시던데.”
“가족, 아니에요.”
나답지 않게 단호히 말했다. 쿠로와 나를 가족이란 단어로 옭아매고 싶지 않았다. 나의 감정을 그런 식으로 가둬두고 싶지 않았다. 다시 고개를 돌려 빠르게 지나가는 가로등을 바라보았다.
“도착했어요.”
여자의 도움으로 쿠로를 내리고 집 앞까지 함께 부축했다. 여자는 집 앞에서 우물쭈물거리는 모습을 보이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까 실언을 한 것 같네요. 기분 나빠하실 줄 몰랐어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조심히 가세요.”
내가 그리 기분 나쁜 티를 냈던가. 다른 일도 아니고 쿠로에 관해 감정이 상할 줄은 몰랐다. 아, 어쩌면 쿠로가 아닌 내 감정에 대해서일지도 모르겠다. 그가 차에 들어가는 것을 바라보다가 쿠로를 올려다보았다. 잠에 취해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그를 나지막이 불렀다. 쿠로. 그는 대답이 없었다.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불렀다. 쿠로, 쿠로. 쿠로오.
“…테츠로.”
입 맞춰도 돼?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까치발을 들어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눈을 감아 그의 입술에 내 입술을 맞췄다. 부드럽다. 촉촉하고, 아리다. 심장은 먹먹하고 숨을 제대로 뱉어내기가 어려웠다. 입술을 뗐을 땐, 아직 가지 않은 여자의 차가 보였다.
급하게 그를 데리고 집에 들어갔다. 현관 문턱에 걸려 넘어지고 아픈 허리를 붙잡으며 일어섰다. 쿠로는 여전히 잠에 빠져 일어나지 않았다. 그의 신발을 벗기고 팔을 잡아당겨 재킷마저 벗겨 버렸다.
“쿠로.”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다시 입을 맞춰볼까. 그 생각은 바로 관뒀다. 쿠로가 게슴츠레 눈을 떴기에.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불렀다. 쿠로. 그는 대답도 없이 눈을 끔뻑이며 나를 쳐다보았다.
“일어나. 일어나서 씻고 자, 쿠로.”
“…키코.”
그의 입에서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 불렸다. 키코. 나를 두고 죽은 나의 엄마. 코즈메 키코. 그가 나의 두 팔을 붙잡으며 엄마의 이름을 불렀다.
“키코. 왜 나한테 어떤 말도 하지 않았어. 왜…!”
쿠로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차마 그의 이름을 부르지도, 그렇다고 멈춰달라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사랑하는 거 알면서, 왜 그랬어….”
쿠로는 다시 눈을 감았다. 끝까지 말을 못했다. 나는 키코가 아니라 켄마라고.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닌, 너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쿠로, 네가 엄마를 좋아하는 건 처음 알았네.”
그래서 늘 나를 그런 눈으로 본 거야? 다정한 눈으로 늘 엄마를 떠올렸던 거냐고. 쿠로, 대답해줘. 내게서 엄마를 봤어?
그가 미웠다. 현관 앞에 엎어져 있는 그를 뒤로하고 내 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었다. 내게서 다른 사람을 보고 있던 그가 미웠다. 나를 나로 봐주지 않는 그가 미웠다.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 그가 죽을 만큼 싫었다.
다음 날 아침, 그는 숙취로 힘들어하며 눈을 떴다. 뻗친 머리카락과 다크서클이 내려온 그의 얼굴. 아침 일찍 집에 들린 시로가 쿠로에게 커피를 건넸다.
“켄마가 데리러 간 건 알아?”
“응, 기억나.”
“왜 이렇게 많이 마신 거야? 켄마가 데리러 가게 만들고.”
“미안. 오랜만에 달렸더니 조절을 못했네. 나 어제 별로였어, 켄마?”
쿠로를 힐끗 바라보다 시선을 다시 게임기 화면에 두었다. 쿠로는 언제나 별로야. 쿠로의 작은 칭얼거림과 시로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결코 깰 수 없는 자그만 행복들. 이제는 이 행복에 이질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쿠로는 그날 밤, 내가 입술을 맞춘걸 기억하지 못했으며 그날 이후 딱히 크게 달라진 것도 없었다. 쿠로는 언제나처럼 최선을 다해 일을 했고, 나는 모든 날들을 무기력하게 보냈다. 조용한 나날들. 조용한 세상과 조용한 너와 나의 관계. 이제는 의문이 들었다. 이 발전 없는 관계가 과연 맞는 것인지. 그럼에도 이 이상 발전할 수 없는 관계에 끝없이 무너졌다. 너와 나의 사이는 더이상 나아갈 수 없다.
18살이 되던 해, 시로에게 들켰다. 이미 부풀어질 대로 부푼 내 감정을. 솟구쳐 나오는 감정을 주워 담지 못해 결국 들키고 말았다. 시로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었다. 시로에게 어떻게 쿠로를 좋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건의 발단은 이러했다. 술을 마신 쿠로에게 입을 맞춘 그 날을 기점으로 술을 많이 마셔 취하고 온 날이면 곤히 자고 있을 때를 틈타 몰래 입을 맞추곤 했다.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진 나조차 이해되지 않았다. 그저 몸이 하고 싶은 대로, 이끄는 대로 행동했다. 가지지 못한다면 이렇게라도 그를 탐하라며 누군가 내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시로에게 들킨 날도 쿠로는 취해있었다. 잠을 자고 있는 쿠로에게 입술을 맞추고 고개를 든 순간, 시로와 눈이 마주쳤고 숨이 멎을 뻔했던 것 같다. 시로는 내게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집을 나갔다. 내게 주려던 애플파이 봉투는 바닥에 떨군 채, 그렇게 나가버렸다. 시로의 표정이 어땠는지 아직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음 날, 학교에서는 오로지 시로의 생각뿐이었다. 커다란 죄를 지은 느낌과 불편한 마음 속 피어나는 또 다른 마음. 차라리 들켜서 잘 됐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내가 사랑하는 나의 가족에게 상처를 안겨주고 싶진 않아 시로에게 문자를 남겼다. 몇 번이고 썼다 지운 지 모르겠다. 시로. 오늘 언제 끝나? 얘기하고 싶어.
답장은 의외로 빠르게 왔다.
[오늘은 일찍 끝나. 6시 30분 쯤에 너희 집으로 갈게. 오늘 일찍 끝나지? 애플파이도 사갈까?]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시로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뱉고 책상 위로 엎드렸다. 이미 엎질러진 물. 주워 담지 못한다면 닦기라도 하자.
집에 들어가니 시로는 이미 도착해 있었다. 애플파이도 잔뜩 사놓은 채 나를 반기는 시로. 가방을 내려놓고 시로의 앞으로 가 아무렇지 않게 말을 꺼냈다.
“왜 이렇게 많이 사 왔어.”
“너 많이 먹으라고. 밥 대신 먹지는 말고.”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애플파이 하나를 집어 입안에 넣었다. 시로는 그런 나를 빤히 쳐다보다 손을 뻗어 내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시로의 쓰다듬을 받고만 있었다.
“언제부터야?”
시로의 말에 대답조차 못했다. 실은, 나도 잘 모르겠다. 언제부터 이 불순한 감정이 커져갔는지 나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테츠로도 알아?”
고개를 저었다. 오직 나만이 짊고 가야 될 무거운 감정이기에. 그가 평생 모르길 바랐다.
“어떻게 하고 싶어?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어떻게든 도울 수 있어.”
그 질문에는 확답을 할 수 있다.
“집을 나가고 싶어.”
그게 쿠로에 대한 감정을 끊을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기에.
시로는 처음에 반대했다. 지금 당장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없을뿐더러 나는 아직 시로와 쿠로에게 보호받아야 하는 어린아이였으니. 부정은 안 했다. 시로의 말은 틀리지 않았으니까.
“지금 당장 나가겠다는 게 아냐. 그냥 천천히 쿠로한테서 멀어지고 싶어.”
그것뿐이야. 다른 이에게 들킨다면 눈물을 흘릴 줄 알았다. 드라마에선 종종 나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정작 내가 그 대상이 되니 눈물은커녕 너무나도 침착했다. 불안하지도 않았고 그저 천천히 내 얘기를 시로에게 전했다. 시로는 의외로 내 말을 진지하게 끝까지 들어주었다.
“나라면 어떻게든 쿠로 곁에 남고 싶을 것 같은데, 켄마는 왜 떠나겠다고 하는 거야?”
얘기를 다 들은 시로는 정말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그 물음에 나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떨지 않고, 숨을 가다듬으며 식은땀도 흘리지 않고 묵묵히.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으니까.”
쿠로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그를 떠나보내는 거야. 시로, 나는 떠나는 게 아니야.
그때 시로의 표정이 어땠더라. 생각이 나지 않는다. 어쩌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걸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차곡차곡 모은 돈으로 작은 원룸을 구했다. 시로에게 많은 도움을 얻었다. 떠나기 하루 전, 시로는 절대 연락을 끊지 말라는 당부까지 남겼다. 어색하게 웃으며 그러겠노라 대답했고, 길게 느껴지던 시간이 지나 오늘이 되었다. 그를 떠나보내는 그날. 내 스무살의 시작과 동시에 10대의 마지막. 그는 내가 떠나는 걸 모른다. 차라리 잘된 것이라 생각했다. 이 정도의 아픔쯤은 그가 감당하길 바랐다. 나는 그동안 더 아픈 감정을 짊어진 채로 살아왔으니. 그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러나, 내가 겪은 고통을 그도 똑같이 겪길 바랐다. 이 얼마나 모순적인 생각인가. 스스로가 비참했다. 떠나는 이 순간에도 그가 알아채고 나를 잡으러 와주길 바라고 있으니.
내가 떠난 뒤, 그의 하루가 나로 뒤덮여 졌으면 한다. 내 생각에 밥도 먹지 못하고 물도 제대로 삼키지 못하길 바란다. 혼란한 생각들을 정리하다 결국 잠을 이루지 못하길 바란다. 이 악랄하면서도 그댈 사랑하고 있는 나를, 사랑해주었으면 한다. 어지러운 청춘. 모순적인 생각과 정리되지 않는 감정들. 그 안에 피어난, 하얀 꽃. 그대를 떠나보내는 나.
카사블랑카, 그대를 진정 사랑하기에 떠나보내겠습니다.
#후기
합작 열어주신 시바님 감사합니다! 덕분에 즐겁게 마감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대메이저 쿠로켄!! 비루한 글이지만 재밌게 읽어주세요:) -쿠로켄 사랑 동호회 회원 흑막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