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팬지- 나를 생각해주세요
나를 생각해주세요
by. Chell(@H_556520)
인어는 떼를 지어 생활하는 무리가 아니었다. 그 누구보다도 개인주의의 종족. 아이가 어느 정도 살 수 있는 능력이 길러진다면 독립을 시켰다. 인어의 특성에 따라 저는 태어나고 가족의 정을 느낄 새도 없이 독립을 했다. 남들보다 빠르게 독립을 했지만 그렇다고 가족의 정이 그리웠냐고 하면 그것은 아니었다. 그냥 저에게는 그게 당연한 일이었고, 별 문제 없이 생활했다. 벌써 독립을 한지 어연 13년. 그리고 오늘은 내가 태어난 지 18년이 된 날이었다.
오늘 하루도 여느하루와 다름없이 자는 동안 돌아간 진주 목걸이를 원래대로 돌리며 시작했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가족의 물건. 집을 나오기 직전에 받은 엄마의 진주로 만든 목걸이는 그 이후로 한 번도 제 목에서 떨어지지 않은 채 붙어있었다. 신경을 쓰지 않으면 진주가 곧잘 돌아가있곤 했지만 굳이 잘 있는 것을 벗어던질 필요성을 못 느꼈기에 그대로 두었다.
태어난 날이지만 별 다른 일을 하는 것은 없었다. 집을 나온 이후 몇 년만 생일을 특별하게 보냈지, 근 몇년간 나에게 있어 생일은 그저 그렇게 지나가는 날이었다. 귀에 생일 축하한다고 말하는 어린 아이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스치고 지나갔지만 다시 듣고 싶지 않다는 듯 귀를 막았다. 그냥 침대(커다란 조개를 줏어다 만들었다.)에서 조금 꾸물대다가, 이렇게만 보내도 좋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아마도 그렇게 했을지도 모른다. 밖에서 절 불러대는 시끄러운 말미잘만 없었더라면.
"켄마!!!! 켄마!!! 문 좀 열어봐!!"
어떤 날을 기점으로 무엇을 해야겠다는 의지가 모두 사라져 집에서만 생활을 했는데 그 때 아마 우리 집 앞에 자리를 잡은 듯 했다. 누가 무엇을 하든 상관이 없었기에 무시했지만, 그쪽은 아니었는지 몇일에 한 번씩 나올 때마다 저를 보고 꾸준히 말을 걸어댔다. 대꾸를 열심히 해주지 않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꾸준히 말을 걸어오는 것에 이미 질릴 대로 질려버렸다.
지금도 벌써 10분이 넘게 저를 불러대고 있는 탓에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지느러미를 거세게 휘저으며 밖으로 향했다. 문을 여니 촉수마다 독을 품고 있는 주제에 자기는 무해하다는 마냥 흐물거리는 말미잘이 보였다.
"왜 불러."
"생일 축하해 켄마!! 오늘 같은 날에 설마 침대에만 있을 생각은 아니지?"
"맞는데?"
"아, 왜~ 나랑 가자! 재밌는 사실도 알아 왔다고!"
"......들어보고 결정할게."
사실은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직설적으로 말했다가 몇 일 내내 저 지긋지긋한 말미잘에게 시달린 것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짜증이 났다. 정말 하나도 궁금하지 않다는 듯 눈은 다른 곳을 응시 하고선 말미잘에게 말해보라고 고개를 까닥였다. 그에 아랑곳 하지 않고 입을 여는게 어지간히 심심했었나 싶었지만.
"저 해변 가까이에 사는 인어가 뭐든 알고 있대. 정말 뭐든. 재밌는 것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어때? 끌리지? 켄마 너 재밌는 거 좋아하잖아."
재미있는 것? 자기 촉수로 유인해 죄없는 물고기들을 마비시키는 것을 보여주며 재미있지 않냐고 물어본 뒤로 말미잘의 재미의 기준에 대한 신뢰도는 바닥을 친지 오래였다.
"인간들의 꽃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있다는데?”
"가자."
말미잘은 내가 금방이라도 침대에 돌아갈 얼굴을 하니까 재빨리 더 흥미를 끌 수 있을만한 사실을 말했다. 그리고 그건 정확히 제 흥미에 적중했다. 습관적으로 문 바로 옆 탁자에 올려져 있는 손수건을 들어올렸다. 보라색 꽃 자수와 그 아래 적혀있는 누군가의 이름. 이 꽃에 숨겨진 뜻이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라고 하며 장난스레 웃던 얼굴이 눈 앞에 스쳐 지나갔다. 그에 오기가 생겨 알아 내려고 했지만 인간들의 세상에 무지한 바다 생물들에게 꽃말을 알아내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근데 그 인어가 알고 있단 말이지.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지만, 이건 단순한 궁금증일 뿐이니까. 자연스레 합리화를 하는 것을 깨닫고 짜증이 났다. 이러면 내가 못 잊은 것 같잖아. 거칠게 손수건을 내려놓았지만 물의 영향을 받아 얌전히 제 자리로 돌아갔다.
-오늘은 저거 안가져가?
-응.
대답을 하고 말미잘을 따라나섰다.
*
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말미잘을 노려보았고, 말미잘도 자기의 잘못을 알았는지 너울대던 촉수를 그러모았다. 아니, 적어도..
"어딘지는 알고 있어야 하는 거 아냐?"
근일간에 이렇게 많이 움직인 것은 처음이라서 그런지 지느러미도 찌릿찌릿 쑤셔왔다. 인간의 꽃들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말에 따라 나온 제 잘못이었다. 이제 신경 쓰지 않기로 했는데. 그러나 후회는 늦었다. 곁에서 말미잘이 안절부절못하다가 자기가 주변을 둘러보고 오겠다며 떠나갔다. 쟁알대던 목소리가 사라지니 아프던 지느러미도 괜찮아지는 것 같았다. 역시 한시도 쉬지 않는 입 때문이었던걸까. 아프지 않은데 여기에 가만히 앉아있을 이유도 없고, 그 인어를 찾으러 주변을 돌아다니기로 했다. 말미잘을 위한 것은 아니고, 나를 위해서.
그렇지만 이런 식으로 확인하게 될 줄은 몰랐다. 내가 방향에 감각이 없다는 것을. 어찌된 이유인지 어느쪽으로 가도 아까 말미잘이 기다리라고 했었던 곳이 보이지 않았고 똑같은 곳만 돌고 있는 기분이었다. 두 바퀴쯤 돌았지만 찾을 수 없길래 포기하고 마음이 가는대로 가기로 했다. 뭐.. 내가 안보이면 화난줄 알고 집으로 간 줄 알겠지. 지느러미를 움직이는 것조차 귀찮아 물이 흐르는 대로 몸을 맡겼다. 길은 하나로 이어져 있다고 했으니까. 이렇게 가다보면 그 인어를 발견할 수도 있다고 태평하게 생각했다. 넓디 넓은 바닷속에서 할 말은 아니긴 했지만.
지느러미도 움직이지 않겠다, 마음은 여유롭겠다, 흘러가는 물에 몸을 맡기며 주변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점점 환하게 밝아지는 것이 어딘가 익숙한 풍경이었다. 한 때 매일 지나다니던 곳. 찰나도 되지 않을 순간에 고민을 했다. 여기 가봤자 제가 원하던 것은 없을게 분명한데. 다시 되돌아가 말미잘이나 찾으러 갈까. 생각은 계속해서 이어졌지만 제 몸은 여전히 물살에 몸을 맡기는 중이었다. 이미 그른것 같다. 주변 구경은 포기하고 모른척 눈을 감았다. 눈을 뜨면 그 곳에 도착해 있겠지. 자연스럽게 오늘은 가지고 오지 않은 물건이 떠올랐다. 보나마나 오늘도 없을테니 필요는 없겠지만.
물의 유동이 갈수록 거세지고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걸 보아하니 거의 다 온 것 같았다. 한창 자주 올 때는 이렇게 짧은 거리에도 너를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만 잔뜩 안고 왔더랬다. 그 기대감은 그 때 모조리 밟혀 사라진 줄 알았더니 지금도 끈질기게 고개를 내밀었다. 여기에 아직도 남아있다고 알려주기라도 하듯 심장이 쿵쿵 뛰며 몸을 울렸다. 안된다고, 꾹꾹 눌러 담았지만 마음대로 되는 거였다면 애초에 이쪽으로 오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 방향을 틀었겠지. 진짜로 오늘이 마지막이야. 오늘 없으면 절대로 오지 않는거야. 제 스스로 마음을 다잡고 있으니 해수면과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눈을 꼭 감은 채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물 밖으로 천천히 얼굴을 내밀었다.
아. 역시나.
있을리가.
내일도 오겠다며 손을 흔들며 떠난 너는 그 다음날도, 내 생일에도, 그 해의 마지막 날에도 오지 않았다. 왜 안오지? 날짜를 착각했나. 하고 놓지 않던 희망은 저를 매일 실망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아직까지 놓지 못한 희망으로 끈질기게 고개를 들이민 기대감은 다시 한 번 진창으로 쳐박혔다. 가지면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가진 제 잘못인줄은 알고 있었다. 이제 정말로 다시는 오지 않아야지. 어쩌다가 오게 되더라도 고개 한 번 내밀지 않고 집으로 가야지. 퐁, 소리 없이 흘러나온 진주가 내 얼굴을 타고 물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짜피 진주로 변해버린 눈물은 얼굴에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지만 습관적으로 눈가를 훔쳤다. 끊임없이 짓밟힌 기대감은 다시 밟히더라도 무뎌져 괜찮을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처음 마주한 것과 다를 바 하나 없었다.
너무 많이 와서 눈을 감고도 무엇이 있는지 짚을 수 있기에 오랫동안 볼 필요는 없었다. 이제 정말로 안녕. 괜찮아지면 다시 올게. 이제 다시는 오지 않을 곳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미련없이 뒤로 돌아 바다로 뛰어 들었다.
"ㅋ..ㅔ..ㅁ..!!!!"
들어가자마자 희미하게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 곳에는 뛰어왔는지 무릎을 부여잡고 숨을 헐떡거리는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헤어지기 전의 모습보다 조금 더 성숙해지고 키가 컸지만 분명 제가 아는 그 아이가 맞았다. 헛것을 보고 있나 해서 눈을 몇 번이나 깜빡였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그제서야 너의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있었다. 네가 남기고 간 손수건 귀퉁이, 보라색 꽃 아래 검정색 자수로 새겨진 이름. 적혀 있는 이름을 불러줄 상대가 없어 매일 삼키기만 하다가 이제서야 입 밖으로 내놓을 수 있게 되었다.
"쿠로..?"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자기가 먼저 내 이름을 부른 주제에 입을 꾹 깨물고 아무말을 하지 않았다. 나를 까먹었나. 아닌데, 내 이름을 부른걸 보면 까먹은건 아닌데. 내 말에 대답이 없는 너를 보고 온갖 부정적인 생각만 떠오르니 오죽 너를 그렸으면 싶었다. 빨리 어떤 말이라도 해. 뭔지 모를 조바심에 입안이 건조해져 침을 삼키는 도중 쿠로가 갑자기 자리에 주저앉았다. 어디 다치기라도 했나 싶어 재빨리 곁으로 헤엄쳐 곁에 도달한 순간, 마주친 얼굴은 눈물로 잔뜩 젖어있었다.
왜. 왜 너가 우는거야. 네가 왜. 생각은 그리 하면서도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손을 가져갔던 모양이다. 저도 모르게. 얼굴에 손이 닿기 전에 쿠로가 내 팔목을 잡아챘다. 잡힌 팔목이 뜨겁게 달아오르지 않아 의아함에 눈을 옮겼더니 옷으로 손을 감싼 채 팔목을 쥔 손이 보였다.
"안돼. 다쳐."
그렇게 몇 년이 지났는데 바뀐거 하나 없이 넌 여전히 다정했다. 인간의 온도에 취약한 줄 모르고 멋대로 만져대다 네 살갗에 닿은 손이 화상을 입어 당황하며 손수건을 빌려준 이후로 넌 다정하지 않은 법이 없었다.
"쿠로, 왜 그랬어?"
네가 떠난 후 틈이 날 때마다 네 생각을 하고, 고민을 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날 그렇게 아무말 없이 떠난 이유가 무엇인지. 제멋대로 입이 움직이며 여태까지 쌓아온 말들을 쏟아부었다.
"난 내일 온다고 하는 네 말만 믿고 언제나 기다렸어. 오늘은 올까, 내일은 올까. 근데 끝까지 안오길래 마음 접고 가려는 순간 온 이유가 뭐야? 내가 이렇게 되기까지 기다렸어?"
"아냐, 그게 아니야. 켄마. ...미안해."
쿠로가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그럼 뭔데. 인간도 아닌 애와의 약속은 딱히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거야?"
홧김에 말을 쏟아붓고 나니 저보다 더 상처받은 얼굴의 쿠로가 보였다. 그 얼굴을 보고 되려 제가 흠칫 놀라 입을 꾹 다물며 마주하고 있던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리고 한동안의 정적. 그 정적뒤에 이어질 말들이 그래, 조금은 무서웠던 것 같다. 차라리 아무말도 듣지 않는게 더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아직도 잡혀 있는 팔을 빼내려고 살짝 비틀었지만 잡고 있는 손에 힘이 풀리지 않았다. 놔 달라고 말하려던 순간 갑자기 우리가 어렸을 적 자주 놀았던 큰 바위로 데려갔다. 아 여기. 해변과 물에 반씩 걸쳐져 있는 바위는 어렸을 적의 우리가 보기에도 앉아서 이야기 하기 딱 좋은 곳이었기에 행동에 제약이 있는 저를 위해 여기에서 자주 놀고는 했다.
근데 여기는 왜. 의문을 가지던 찰나 쿠로가 갑자기 바위의 주변에 툭 튀어나온 부분을 파기 시작하더니 어떤 자그마한 유리병을 찾아내 모래를 툭툭 털었다. 유리병의 마개를 열고 그 안에 들어있던 종이들 중 하나를 꺼내서 제게 건넸다. 이게 뭐길래, 하고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인 종이에는 헤어졌을 당시의 쿠로가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과 언제 이 곳에 오는지에 대한 것들이 적혀있었다. 그 종이들의 존재조차 몰랐던 저는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너라면 분명 볼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아니, 미안해."
조금 더 잘 보이게 두었어야 하는건데. 아니 애초에 너에게 말을 했어야... 자책을 하며 쿠로는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 뒤에 말을 신경쓸만한 정신은 없어 흘려들으며 나머지의 종이들을 꺼내 펼쳐보았다. 어느 것은 편지같은 것이 적혀있었고, 어느 것은 이 시간에 나와달라는 듯 날짜와 시간이 적혀있었다. 꽤 최근에 쓴 것처럼 보이는 종이들도 보였다. 쿠로는 많지도 적지도 않은 쪽지를 죄다 읽을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나를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여태 네가 날 까먹고 살다가 지금에서야 뻔뻔하게 돌아온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너는 꽤나 많은 노력을 하고 있었다. 머릿속이 뒤엉켜 아무말도 하지 못한 채 들고 있던 종이들을 네게 건네고 바닷속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당황한 듯이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겁쟁이처럼 이 문제에서 도망쳤다.
*
어찌저찌 집으로 돌아온 뒤 집 앞에서 날 붙잡고 어디갔었냐고 묻는 말미잘을 무시한 채, 침대로 향했다. 아니, 향하기 전에 문 근처에 놓여진 쿠로의 손수건을 집어들었다. 처음에 너를 만났을 때 서로에게 낯을 가리다가 내가 다친 모습에 서슴없이 자기의 손수건을 내어주던 네가 신기했다. 빌려주긴 했지만 그 손수건이 어지간히 소중했는지 다음 날 똑같은 시간에 여기로 받으러 오겠다고 말했다. 그 와중에 저는 이 손수건이 있으면 너를 계속해서 만날 수 있을거라 생각해 당연하게도 다음 날에 가져가지 않았지만.
그렇게 돌려주지 않은 손수건으로 약속을 잡아왔지만 쿠로는 어느순간부터 손수건에 대해 관심이 없어졌다. 우리는 그 후로 약속을 잡을만한 이유가 없어도 약속을 잡았다. 이럴 만한 사이가 된 것이 기쁘면서도 언제라도 그만두자고 말할 것 같아 한편으로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너와 하루하루 함께하며 알아가는 모든 것들이 신기했다. 그 어린 시절에는 차근차근 나에게 정을 가르쳐준 너를 멋지다고 생각했다. 네가 알려준 다정함, 애정을 한 번 맛보고 나니, 그것을 알기 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네가 사라진 몇 년 동안 널 놓지 못한 것이.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러게 되면 미련없이 바로 끊어버렸을텐데.. 그 생각을 마친 순간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신을 차려보니 손수건을 손에 쥔 채 아까 갔던 장소를 향해 헤엄치는 중이었다. 네 얼굴을 봐야 지금의 이 복잡한 마음을 정의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그 자리에서 벗어나고 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그곳에 왠지 모르게 아직도 쿠로가 있을것만 같은 확신이 들었다. 조급한 마음에 아까보다 배는 빠르게 움직여 도착했더니 역시나 아까 그 바위 위에 등을 보인 채 그대로 앉아 있는 쿠로가 보였다. 왜 아직도 안가고 있는거야. 좋았지만 싫은 감정이 공존했다. 기척을 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쿠로는 이미 내가 온 것을 눈치챈 듯 뒤를 돌아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바위 아래로 내려와 내 눈높이에 맞춰 쭈그려 앉았다. 내가 들고 있는 손수건을 보고 눈을 크게 뜨고 바라 보다 이내 입가를 올리며 내가 감정을 정의내릴 새도 없이 입을 열었다.
"내가 용서받지 못할 것을 알아. 그래도.."
어렸을 적부터 잘못을 한 것들에게 미련을 남기지 않은 채 끊어온 것을 본 쿠로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 듯 했다. 뭐라 말을 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모습을 본 쿠로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더 환하게 웃어보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이 말은 하고 싶었어. 켄마, 생일 축하해."
그리고 옆에 세워져 있던 종이백을 내게 건넸다. 들여다 본 종이백 속에는 쿠로와 같이 지내던 시절 제가 가장 마음에 들어했던 애플파이가 들어있었다. 저에 대한 것을 아직까지 기억해주고 있는 모습에 안도감이 먼저 들었다고 하면 이기적인걸까. 내 반응을 보고 있던 쿠로는 이제 할 일을 다했다는 듯이 슬슬 일어날 준비를 하길래, 받은 것을 도로 바닥에 내려놓고 너에게 다가가 포옹을 했다. 내 갑작스런 행동에 얼어붙은 쿠로는 경직되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가만히 내 포옹을 받고만 있었다.
"... 용서할게."
네가 알려준 것들로 이루어진 나는 이제 너 없이 살아갈 수가 없다. 쿠로는 숨을 쉬는 것을 멈춘 듯 했다. 그리고는 제 살갗에 피부가 닿지 않게 조심하며 저를 마주 끌어안고 미안해, 고마워를 번갈아 가며 말했다. 제 어깨쪽에 뜨거운 물이 떨어지는 것은 눈치껏 모른척 해주었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이쯤이면 되었겠지, 하고 포옹을 풀어내는 순간에 쿠로의 옷에 있는 단추에 진주 목걸이가 걸려서 풀어지며 바다 안으로 빠졌다. 지금에라도 줍는다면 주울 수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감정을 추스리고 우리는 어릴 적에 놀던 것처럼 바위에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했다. 3년의 이야기를 하다보니 해가 지고, 달이 저 위로 올라간지 오래였다. 여기에 날 만날 각오로 한 달을 잡고 왔는데 일주일도 안돼서 날 만났다고 쿠로는 말했다. 우리가 만날 날들은 꽤 남았고 이제 너를 보내주어야 할 시간임을 알았지만 이상하게 내일 보자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쿠로도 그걸 눈치챘는지 장난스레 내게 물어왔다.
"밤 새면서 얘기나 할까?"
"됐어. 그냥 가."
용서와 신뢰는 별개였다. 난 쿠로를 용서했지만 신뢰하지는 않았다. 오랫동안 천천히 깨부셔진 신뢰는 다시 회복하기에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이제 정말 보내줄 것처럼 나는 바닷속으로 풍덩 빠져들었다. 오랫동안 앉아 이야기를 하느라 메마른 지느러미가 다시 촉촉해졌다. 온 몸에 수분 공급을 해주고 난 뒤 쿠로를 쳐다보니, 멍하니 이 모습을 보고 있다가 눈치껏 바위에서 일어나 갈 준비를 했다.
"내일 꼭 올게."
준비를 다하고도 한참을 가지 않고 무슨 할말이 있는 것처럼 어물거리더니 저런 말을 하기 위해서였나. 아무리 이런 말을 해봤자 사라진 신뢰는 돌아오지 않는 것을 알텐데도. 어떤 행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더니, 쿠로는 쓰게 웃으며 먼저 가라고 손짓해보였다.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 바닷속으로 소리 없이 들어갔다. 그 날도 그랬지. 쿠로가 먼저 가라고 인사를 하고 제가 먼저 그 자리를 떴다. 그 상황이 데자뷰처럼 제 머릿속을 훑고 가더니 갑자기 불안함이 밀려왔다. 가던 길을 멈추고 다시 쿠로에게 돌아갔다.
"왜? 뭐 두고갔어?"
"아니. 내일 오면 할 얘기가 있으니까..."
"..응. 꼭 올게."
"내일 봐. ..쿠로."
아까 너를 본 직후 깨달았던 감정을 말하려고 했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네가 궁금해하는 것을 내걸고 약속을 잡아야지. 그러면 너는 궁금함을 견디지 못하고 매일매일 올테니까. 궁금함을 가득 담은 채 저를 쳐다보고 있는 쿠로를 뒤로하고 아까와는 다른 마음으로 바닷속에 뛰어들었다. 심장이 기분 좋게 쿵쿵 울렸다. 오랜만에 나쁘지 않은 기대를 품은 채 잠에 들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후일담
“내 손수건에 새겨진 꽃 말이야. 그 꽃에 숨겨진 뜻 알아냈어?”
“아니. 이제 별로 관심 없어.”
“말해주려고 했는데?”
“.. 그럼 말해봐.”
“나를 생각해주세요.”
#후기
여러분이 이걸 보셨다면.,전 마감을 했다는 거겠죠...? (사실 이 후기 마감 안했는데 먼저 쓰고 있어요.. ㅋㅋㅋㅋㅋㅋ 재밌다.. ..)
일단 제 적폐캐해 쿨켄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 합작을 열어주신 시바님께 감사의 인사 올립니다.. 뭐야 우리 커플링 대박났다!! 이 글의 탄생(?) 계기부터 알려드리자면.. 이 합작 이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쿠로 사랑을 알려줘서 고마워.< 이걸 보고 저는 기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아니 어떻게 이런 이름을? (멋진 이름 아이디어 내준 김사이님에게도 감사인사 올립니다..)
그래서 이 대사를 말하고 있는 켄마를, 켄마의 시점에서 서술해보고 싶었어요. 애정을 모르던 인어가 그 사랑을 배운게 인간이라면..뭔가 그 애정을 기반으로 그 인간이 세계가 되는 걸..쓰고 싶었습니다. 흑흑 제가 조금 더 말솜씨가 좋았더라면 더 잘 풀어낼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저의 한계는 여기까지였음을... 이제 잘 모르겠어요 과제마냥 제출한 것에 의의를 두기로 했습니다. 가뜩이나 이렇게 중간 호흡의 글을 이끌어가는 것이 아직 저에겐 미숙한 부분이라서.. 다음에는 더 발전해서 돌아오겠습니다^^(은근슬쩍 다음에도 열어달라는 말
그리고 혹시나 더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사실 엄마의 진주목걸이를 계속하고 있던 켄마는 자기도 모르게 가족의 정을 바랬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엇습니다..마지막에 풀어진 이유는 그 정을 쿠로로 인해서 다 채웠기에..필요가 없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