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란 장미- 영원한 사랑, 우정, 시기, 질투
친애하는 K에게
by. 먼지떨이(@munge_bye)
저도 모르게 잠들었던 쿠로오가 눈을 떴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는 언젠가 켜두었던 작은 불빛 앞으로 가 앉았다. 낡은 책상 위에는 신경질적으로 구겨진 종이뭉치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며칠째 제대로 씻지도, 먹지도 못한 초췌한 얼굴 위를 쓸어내린 커다란 손이, 종이뭉치들을 힘없이 쳐냈다. 더 이상 제 가치를 증명 받을 수 없는 종이뭉치들은 마치 자신의 운명에 순응하듯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쿠로오는 구석에 숨어 떨고 있는 낡은 펜을 집어들곤 펜촉에 잉크를 묻혔다. 그리곤 오늘 밤도 새하얀 종이 위로 소리 없는 절규를 토해냈다. 다시는 볼 수도, 만날 수도 없을 그를 위해.
친애하는 K 에게
코즈메는 하얀 블라우스가 잘 어울리는 아이였다. 그가 태어나기 전엔 한 차례의 커다란 전쟁이 마을을 뒤덮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거나 생이별을 겪었고 지식인들은 닥치는 대로 끌려가 끝내 돌아올 수 없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성장하게 된 세력이 바로 상인이었다. 그들은 전쟁 물자를 보급하거나 생필품을 판매하며 부와 권력을 얻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전쟁이 끝나고도 계속해서 이어졌다. 때문에 상인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이윤을 쫓아 움직였고. 때로는 그것이 피를 불러올지라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얀 블라우스를 입은 코즈메는 금발이 잘 어울리는 아이였다. 마을에서 제일가는 상인의 하나뿐인 귀한 아들. 부부의 길고 긴 염원이 닿아 뒤늦게 만나게 된 하나뿐인 귀한 아들. 그렇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하얀 블라우스를 입은 그를 남몰래 증오했다. 마을에서 제일가는 상인 부부가 금이야 옥이야 키운, 눈부시게 빛나는 새하얀 블라우스를 입은 금발 소년을. 누군가를 상처 입힐 수 있는 감정은 언제나 아래를 향하기 쉬운 법이었다.
그런 코즈메를 쿠로오가 처음 만나게 된 것은 어릴 적의 일이었다. 꽃샘추위가 서서히 물러가고 따스한 봄기운이 모두를 감싸 안은 계절. 오랜 지병을 앓았던 어머니가 곁을 떠나자 몇 시간이고 멍하니 그녀의 곁을 지키던 쿠로오는 어느 순간 홀린 듯 밖으로 향했다.
때를 기다리던 꽃봉오리들이 만개한 길가는 여느 때보다 아름다웠다. 수많은 이들의 들뜸과 설렘, 행복한 웃음소리가 가득 담긴 거리를 걸으며, 쿠로오는 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곳을 찾아 정처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어느 순간 멈춰선 곳은 마을에서 유명한 상인의 집이었다. 으리으리한 대저택은 아니었지만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집. 마을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는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기에 꽤나 넓은 정원을 가진 그런 집이었다.
홀린 듯이 다가간 쿠로오는 자신의 키보다도 높은 담을 넘기 위해 애를 썼다. 떨어지고 구르고 넘어지기를 여러 차례. 마침내 담 위에 올라선 쿠로오는 눈앞에 펼쳐진 저택과 정원의 풍경을 한동안 멍하니 내려다봤다. 마을에서는 볼 수 없는 희귀한 꽃들이 흐트러지게 피어있는 정원. 부드러운 바람에 어울려 하늘하늘 춤추는 꽃잎들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넋을 잃고 그 장면을 바라보던 쿠로오는 그제야 눈물을 흘렸다. 너무나도 평화로운 풍경에 도리어 숨이 막혔다. 그는 자신에게 더 이상의 걱정거리도, 소망도. 아니 그 무엇도 남아있지 않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산들바람이 그의 머리칼과 꾀죄죄한 볼을 간지럽히고 지나갔다. 쿠로오는 평화롭기 그지없는 이 시간과 풍경 속에 갇혀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모든 것을 잃은 그의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마치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서 홀로 비를 맞고 있는 듯 한 착각이 일었다. 그리고 다시금 눈앞이 밝아졌을 때에는 화려하게 만개한 꽃들 사이에 서있는 코즈메가 보였다.
코즈메는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서 쿠로오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러더니 감정을 읽어낼 수 없는 얼굴을 하곤 그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둘은 그런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갑고 거친 담벼락 위에 앉아있는 쿠로오를 찬찬히 뜯어보던 코즈메는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프릴이 달린 새하얀 블라우스와 퍼프소매 사이로 나온 작고 하얀 손. 쿠로오는 흙먼지에 지저분해진 자신의 손과 코즈메의 손을 번갈아보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잠시 기다려주는 듯싶던 코즈메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홱, 하고 쿠로오의 오른쪽 손을 낚아챘다. 그 바람에 균형을 잃은 쿠로오의 몸이 코즈메를 덮쳤다. 잔디 위로 쓰러진 둘은 그리 아픔을 느끼지 않았음에도 쉽사리 몸을 일으키지 않고 약속이라도 한 듯 그 자리에 몸을 뉘였다. 까슬하고 촉촉한 감촉이 썩 나쁘지 않았다. 꽃잎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너무나도 새파랬고, 깨끗하고 포근한 구름은 느리게 흘러갔다. 아무런 근심도 걱정도 없이 초록빛에 물들어 있자니 또다시 눈물이 흘렀다.
이번에는 먼저 몸을 일으킨 쿠로오가 코즈메를 향해 손을 뻗었다. 코즈메는 흉터로 얼룩진 작은 손을 응시했다. 잠시 머뭇대다 잡은 쿠로오의 손은 거칠었고, 굳은살이 박힌 손끝은 거북이의 등딱지와 같이 딱딱했다. 그러나 둘은 서로의 손을 놓지 않고 부여잡았다. 마주보고 선 그들을 향해 또다시 산들바람이 불었다. 코즈메의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려 쿠로오의 얼굴을 간지럽혔다. 쿠로오는 내리쬐는 햇빛을 담은 코즈메의 금발이 아름답노라 생각했다. 코즈메는 잠시 머리칼을 정리하더니 곧 자신의 새하얀 블라우스로 눈물자국이 선명한 그의 볼을 닦아주었다. 따스한 햇볕이 와 닿자 지독한 아픔이 녹아나왔다. 쿠로오는 그제야 소리 내 울기 시작했다.
***
어머니의 장례는 소박하게 치러졌다. 묫자리를 구할 능력은커녕 장례절차를 밟을 자금조차 없었던 쿠로오는 코즈메의 도움을 받아 간소하게나마 그녀의 마지막을 함께했다. 그들은 코즈메의 집에서 그다지 멀지않은 곳에 위치한 높은 언덕 위로 올라갔다. 그녀가 아끼던 값싼 드레스와 애정했던 낡은 책 한권. 그리고 젊은 날 영원을 기약하며 받았을 빛바랜 반지가 순서대로 흙구덩이 속에 파묻혔다.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계셨던 어머니의 마지막 소망은 전국 각지를 누비며 그 감촉을 자신의 맨발에 새기는 것이었다. 쿠로오는 흰 가루가 된 그녀가 어디로든 날아갈 수 있기를 소망했다. 그리하여 언덕 끝으로 다가간 그는 껴안듯이 들고 있던 작은 목제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바람이 불자 고운 가루들이 춤을 추듯 날아올라 노을 저편으로 사라졌다. 코즈메를 처음 만난 날 불었던 산들바람이었다. 그것은 마치 길고 긴 여행을 떠날 그녀의 등을 밀어주듯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하게 이끌었다. 하늘거리는 꽃들과 풀내음 사이를 지나 그녀가 원하는 곳에 닿을 수 있도록. 그 광경은 꼭 그녀가 흰나비로 환생한 것만 같다는 착각이 들게 했다.
노을빛에 물든 하늘을 한참이나 바라본 그들은 그녀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 다시금 구덩이를 팠던 자리로 돌아왔다. 느린 걸음으로 다가와 앉은 쿠로오는 자신이 직접 어머니의 이름을 새긴 자그마한 판자를 비석대신 힘주어 세웠다. 땅속을 파내고 다시 묻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터라 흙이 촉촉하고 부드러웠다.
코즈메는 정원에서 꺾어다 만든 흰 장미꽃 다발을 쿠로오에게 내밀었다. 어머니께 드릴 꽃을 꺾기위해 담을 넘었다는 그의 말에 꽃다발을 만들어주겠노라 약속한 탓이었다.
“이 꽃이었으면 좋겠어.”
그는 원하는 꽃을 고르라는 코즈메의 말에 일체의 망설임도 없이 흰 장미를 가리켰었다.
“아직 꽃말도 알려주지 않았는데.”
그가 조금 더 화려한 색의 꽃을 고를 줄 알았던 코즈메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유를 묻듯 대답했다.
“괜찮아…, 흰색은 무슨 색이든 될 수 있으니까….”
화창한 날에는 희게 빛났다가, 때로는 노을빛에 물들기도 하고, 캄캄한 밤이 되면 어두워지기도 하고. 그렇게 자유롭게 사셨으면 했어…, 언젠가는.
그렇게 말하는 쿠로오의 눈에는 무슨 빛이 담겨있었던가. 코즈메는 눈을 감고 기도하는 쿠로오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저 또한 눈을 감고 기도했다.
기도하는 쿠로오의 손끝에는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피딱지가 앉아있었다.
***
그 날 이후 매일 정오가 지나면 쿠로오는 마을에서 가장 유명한 상인의 집으로 향했다. 으리으리한 대저택은 아니었지만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집. 마을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는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기에 꽤나 넓은 정원을 가진 집이었다.
무역상이었던 코즈메의 아버지는 여러 나라를 돌아다녀야 했기에 자주 집을 비우셨다. 그의 어머니는 다른 상인들의 부녀자들과 자주 어울렸다. 쿠로오 또한 전국을 떠도는 기자였던 아버지의 밑에서 자라 대부분의 시간을 어머니와 둘이서 보내곤 했기에, 코즈메 가에는 언제나 코즈메를 돌봐줄 유모와 코즈메, 그리고 쿠로오만이 자리를 지켰다.
쿠로오는 종종 코즈메의 유모를 도와 함께 점심을 준비하며 곁에서 요리를 배우곤 했다. 점심을 함께 한 그들은 유모가 내오는 간식을 먹고 차를 마시며 한가로운 낮 시간을 보냈다. 그 시간이 끝나면 둘은 언덕위로 올라갔다. 그곳에서 쿠로오는 글을 썼고 코즈메는 그런 쿠로오를 그렸다. 상인 가문이었기에 코즈메 가에는 서양에서 사들여온 물감들이 가득했지만, 코즈메는 물감을 사용하기보다 꽃잎을 짓이겨 짜낸 색을 칠하기를 좋아했다. 항상 새하얗게 빛났던 그의 블라우스는 쿠로오를 만난 뒤 점차 다양한 색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놀이가 끝나면, 그들은 언제나 각양각색의 꽃들이 만발한 정원에 누워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며 미래를 속삭였다. 그들이 처음 만난 해에도, 그 다음 해에도, 그리고 10년이란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하루도 빠짐없이. 균형을 잃고 잔디 위로 쓰러졌던 첫 만남의 그 날처럼, 둘은 매일같이 서로의 곁에 누워 하늘을 바라봤다.
그러던 어느 날은 평소처럼 느리게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던 쿠로오가 제 곁에 누워있는 코즈메를 향해 물음표를 던졌다.
“켄마, 그거 알아?”
“…….”
“사실, 나는 아픈 어머니와 나를 두고 떠난 아버지가 정말로 미웠어.”
마치 최근 마을에서 돌고 있는 가십거리를 전하는 듯 한 가벼운 말투에 습관처럼 입가를 맴도는 웃음기. 언뜻 보기에는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코즈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잠자코 그의 말을 기다렸다.
“…아주 오래도록 원망했지.”
쉽게 운을 뗀 것과는 반대로 이어질 말을 덧붙일 때엔 다소 짧은 정적이 흘렀다. 움찔대던 입술을 느릿느릿 떨어뜨린 쿠로오의 시선은 여전히 구름 위에 고정되어있었다.
“…그래서 점점 쇠약해져가는 어머니를 보며 나는 절대로 이곳을 떠나지 않을 거라 다짐했어.”
잠시 숨을 고르는 그의 눈은 그 옛날 어린 소년의 기억을 붙잡아 더듬고 있었다. 단단하면서도 축축한 눈이었다. 코즈메는 여전히 침묵을 유지한 채 그가 자신의 곁으로 돌아오길 기다렸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무뎌지지 않는 아픔에 불그스름하게 물들었던 쿠로오의 눈가가 차츰 본래의 색을 되찾아갔다. 휘몰아치던 아픔이 잦아들자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나도 어쩔 수 없는 쿠로오 가의 사람인가 봐.”
씁쓸한 웃음을 짧게 지어보인 쿠로오가 하늘을 향해 팔을 뻗더니 손바닥을 펼쳐보였다. 그들은 언제나 각양각색의 꽃들이 만발한 정원에 누워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며 미래를 속삭였었다. 그들이 처음 만난 해에도, 그 다음 해에도, 그리고 10년이란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하루도 빠짐없이. 균형을 잃고 잔디 위로 쓰러졌던 첫 만남의 그 날처럼, 둘은 매일같이 서로의 곁에 누워 하늘을 바라봤다.
그러나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그날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루가 저물어가는 탓인지 그날과는 달리 새파란 빛을 띠고 있지 않았고, 깨끗하고 포근했던 구름은 자취를 감춰 한 점도 남아있지 않았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글을 쓰고 싶어.”
그들은 더 이상 그때 그 시절의 어린 소년들이 아니었다.
말을 끝마친 쿠로오가 잠시 머뭇대는 듯싶더니, 긴 시간동안 꾸준히 제 곁을 지켜온 코즈메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던 코즈메도 그런 그를 마주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둘의 눈이 마주치고, 쿠로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때가 되면…, 나랑 함께 해줄래?”
단단하고 곧은 눈. 산들바람에도 이리저리 흔들릴 것 같던 그 소년은 이제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의 눈을 바라보며, 코즈메는 그들이 매일같이 오르는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커다란 느티나무를 떠올렸다. 그리곤 그 눈이 오롯이 향하고 있는 곳을 함께 바라봤다.
“네가 나를 그려주듯, 나도 너를 위한 글을 쓸 테니까.”
그 곳에는 코즈메 자신이 있었다.
잠시 동안 침묵이 흐르고, 코즈메가 살풋 웃었다. 마주 웃은 쿠로오는 먼저 몸을 일으킨 후 코즈메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에 자리 잡았던 어린 날의 피딱지는 흉터로 남아 그의 일부가 되어있었다. 과거의 그날보다는 훨씬 더 크고 투박해진 그의 손을 맞잡을 때, 코즈메는 더 이상 머뭇대지 않았다. 코즈메는 그가 어떤 마음으로 자신의 흉터를 내보인 것인지 알았다. 그는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도움을 청했을 때를 제외하곤 단 한 번도 자신의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낸 적이 없었다.
“…응.”
마주보고 선 그들을 향해 산들바람이 불었다. 코즈메의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려 쿠로오의 얼굴을 간지럽혔다. 쿠로오는 저무는 해의 노을빛을 머금은 코즈메의 금발이 아름답노라 생각했다. 그들은 그렇게 돌아오는 겨울, 성년의 날을 맞이하고 나면, 서로의 부모가 그러했듯 영원을 함께하기로 약속했다.
***
계절이 바뀌고 시간이 흘렀다. 쿠로오는 그리 넓지 않은 집안에서 분주히 움직였다. 허름하고 낡았지만 깨끗하고 아늑한 집. 어머니의 부재 이후 그녀의 흔적이 남아있는 유일한 공간이었기에 그가 매일같이 애정을 쏟으며 유지해온 곳이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담긴 이 공간과도 며칠 후면 헤어짐을 고해야했다. 쿠로오는 미리 싸둔 짐들을 방 한 구석에 몰아넣고 책상 위에 놓인 액자와 그 속의 그림을 바라봤다. 지난 성년의 날, 마을이 훤히 보이는 언덕위에서 코즈메에게 받은 선물이었다. 노을이 따뜻하게 정원을 물들이던 날 쿠로오로부터 미래를 선물 받은 그는, 희미한 별빛이 어둠으로 뒤덮인 언덕 위를 은빛으로 물들이던 날 쿠로오의 미래를 선물했다. 그림 속 쿠로오는 언덕 위 커다란 나무 아래에 앉아, 저 멀리 드넓은 초원이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며 글을 쓰고 있었다. 웃음기 없는 사뭇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의 눈동자는 마치 저녁놀이 잔잔하게 일렁이듯 생기를 띠고 있었다.
쿠로오는 액자를 들어 그림 속 자신의 모습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림을 완성하는 동안 코즈메는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떠올렸을까.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하얀 백지 위를 조금씩 조금씩 채워나가고 칠해나갈 때마다, 코즈메는 그 위에서 무엇을 바라보았고 무엇을 바랐을까. 그는 그의 방식대로 쿠로오와의 미래를 아주 오랫동안 그려왔을 것이다. 아주 오래 전부터 그가 가꿔온 정원과도 같이,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아주 오랫동안 그들의 미래에 대한 소망과 염원을 가꿔왔을 것이다.
그 마음을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어, 쿠로오는 여러 감정이 섞인 미소를 입가에 띠어보이곤 조심스레 액자를 내려놨다. 그리고는 마지막이 될 목적지를 향해 떠날 채비를 서둘러 마쳤다. 자신의 모든 것이 남아있는 공간과의 작별이 힘들어 출발 시간이 다소 지체되었다. 평소보다 꽤나 늦은 출발이었기에, 분명 코즈메가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여느 때와 같이 집을 나서던 쿠로오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바라보다 손을 비비며 입김을 내뱉었다. 밤사이 함박눈이 내린 탓인지 주변 공기가 얼어있어 손이 시렸다. 그러나 장갑을 가지러 돌아가기에는 여유롭지 않은 시간이었다. 어쩔 수 없이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그는 걸음을 재촉했다.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이가 떠올랐기에, 그는 하루 동안 기나긴 어둠이 겹겹이 쌓아올린 순백의 길 위로 자신을 부지런히 새겨나갔다.
그런데 평소와는 달리, 마을이 사뭇 소란스러웠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 바쁜 탓에 각자의 삶에 충실했던 사람들이 어쩐 일인지 한 곳에 모여 있었다. 이를 의아하게 바라보다 지나치려니 익숙한 이름이 들려왔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니 그제야 상황이 보였다. 잔뜩 격양된 어조와 고함소리,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들은 분노와 증오에 잠식되어 있었다.
“없어!! 없다고!!”
“새벽동안 도망친 게 분명해!! 미리 알았던 거야!!”
“그 역겨운 자식, 언젠가는 이렇게 될 줄 알았어!!”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테니 처자식이라도 잡아들여야 돼!!! 예전부터 눈엣가시였다고!!!”
이성을 잃고 광분하는 사람들 중 대개는 무기가 될 법한 도구들을 들고 있었고 거리에는 읽다 만 신문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쿠로오는 추위도 잊은 채 제자리에 꼼짝 않고 서서 떨어진 신문 하나를 주워들었다. 쿵쿵, 심장이 요동칠 때마다 머릿속이 흔들렸다. 입 안 가득 쓴맛이 퍼졌다. 고인 침을 느리게 삼키며, 그는 천천히 신문 위의 글자들을 한 글자씩 읽어 내려갔다. 그리곤 정신없이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유명한 상인의 집으로 내달렸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도 멈추지 않고 쉴 새 없이 달려가 마침내 도착한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옛날의 봄날, 홀린 듯이 다가갔던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집은 더 이상 없었다. 분노에 가득 찬 사람들이 헤집고 떠난 그곳은 엉망진창이 되어있었다. 각양각색의 꽃들이 만발하던 정원은 살갗을 찢어발기는 듯 한 추위에 새하얀 꽃들로 뒤덮였다. 쿠로오는 넋을 잃고 서서 텅 빈 코즈메 가를 바라봤다. 이번에는 어린 날의 그가 본 평화로운 풍경과는 정반대의 풍경에 숨이 막혀왔다. 더 이상의 걱정거리도, 소망도, 그 무엇도 남아있지 않음을 뼈저리게 느꼈던 그 때와는 정반대의 감정을 느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잃은 듯 한 느낌은 그때와 다르지 않았다. 그의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고, 또다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저앉기보다는 연신 눈가를 비벼대며 코즈메의 흔적을 쫒기 위해 애썼다.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채 흰 블라우스를 입고 있을 금발의 코즈메만을 머릿속에 그려댔다. 유모를 도와 점심을 준비하며 요리를 배웠던 부엌, 함께 식사를 했던 공간, 그 후 간식과 차를 마셨던 작은 테라스, 미래를 속삭이며 약속했던 정원…. 그와 함께 한 추억이 있는 곳이라면 그게 어디든 찾아다닐 생각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높은 언덕 위에서 그는 코즈메의 흔적을 찾았다.
에는 듯 한 추위에도 언제나 그 자리에서 흔들리지 않고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을 느티나무 아래. 그가 직접 숨겨놓았을 꾸러미에는 흰 장미 한 송이가 심어져 있는 작은 화분과 쪽지가 함께 담겨있었다.
- k에게 -
익숙한 글씨체로 쓰인 간결한 쪽지는 코즈메를 쏙 빼닮아 그리움이 더욱 사무치게 만들었다. 쿠로오는 코즈메가 남긴 마지막 흔적을 끌어안고는 그제야 소리 내 울었다. 세상은 언제나 그가 사랑한 것들을 빼앗아갔다. 그것이 원망스러워 그는 꺽꺽대며 자신의 가슴팍을 쥐어뜯었다. 그러나 쿠로오는 그 순간조차도, 그것들을 사랑하게 된 자신의 과거를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쥐어뜯은 가슴팍에 앉아있던 피딱지는 흉터가 되어 그의 일부가 되었다.
***
노을이 지자, 쿠로오는 비틀대는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녹초가 된 몸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돌아옴과 동시에 낡은 책상 앞으로 가 앉았다. 매일같이 꿈꿨던 미래에서, 그는 코즈메를 위한 글을 쓰고 있었다. 자신의 미래를 그려준 코즈메를 위해 저 또한 그의 미래를 그릴 생각이었다.
종이를 꺼낸 쿠로오가 펜촉에 잉크를 묻혔다. 언젠가 코즈메가 돌아온다면, 그는 언제나와 같은 모습으로 코즈메를 맞이하고자했다. 우리의 시간은 서로의 미래를 이야기한 그날에 멈춰있을 거라고, 영원을 약속한 그날에 멈춰있을 거라고.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그는 코즈메가 남긴 마지막 흔적을 초연하게 바라봤다. 창밖으로 매서운 바람이 불고, 어두운 방안을 밝히기 위해 켜둔 등불의 불빛이 일렁이자, 그의 주변이 온통 노랗게 물들었다.
그리하여 쿠로오는 매일 밤 흰 블라우스의 금발 소년을 떠올리며 새하얀 종이 위로 소리 없는 절규를 토해냈다.
다시는 볼 수도, 만날 수도 없을.
친애하는 k를 위해.
-END -
#후기
안녕하세요 먼지떨이입니다!!!
여러분이 이 후기를 읽고 계신다면.. 제가 드디어 마감을 해냈겠군요 ㅠㅠㅠㅠㅠ 어흑 !!!
오랜만의 쿠로켄 행사 겸 연성이라 무척 설레고 기뻤어요 ㅎㅅㅎ♡
열정적으로 덕질 할 때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에 뽕도 차고 오랜만에 탐라가 으쌰으쌰해서 좋았네요 ㅠㅠㅠ... (하트
꽃말이 주제인지라 정말 오랜 고뇌 끝에 ㅋㅋㅋㅋ 정했는데, 글 속에서는 제가 정한 꽃이 아닌 다른 식물들만 주구장창 나와서 띠용?! 하셨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렇지만.... 노란 장미가... 주제 맞습니다....!!!!!! 노란 장미는 모순적인 꽃말을 가지고 있어서 참 매력적인 것 같아요. 그리고 다들 눈치 채셨겠지만 .. 켄마 그 자체를 비유한 것이었답니다.
그러나 저는 욕심이 많은지라.. ㅋㅋㅋ 주제로 사용할 꽃말을 하나만 정해야 해서 노란 장미를 선택했는데.. 그 외에 등장하는 식물들의 꽃말도 ,,, 몰래몰래 생각해주시며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문제시 반성문 쓰겠습니다.)
역시 후기 쓰는게 젤 재밌네요.
어찌되었든 미래의 제가 잘 마감을 칠거라 생각하고 .. 저는 다른 분들의 연성을 즐감하도록 하겠습니다 ...
합작 주최해주신 시바님 넘 수고많으셨고!! 감사함다 !!! (하튜 x100